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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독서노트 2021. 6. 16. 23:21 Posted by 죠조

Sapiens

저자 유발 하라리

출판 VINTAGE

발매 2015.05.20.

 

이 블로그는 Sapiens를 읽으면서 작성한 개인적인 독서노트입니다. 원서를 읽어서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책의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생각과 해석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5 History's Biggest Fraud

2백 5십만년 동안 인류는 식물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사냥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약 만년 전부터 사피엔스는 농업혁명을 이루어냅니다. 농업의 시작은 기원전 9500년전부터 기원전 8500년 사이에 터키 남동부, 이란 서부, Levant 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한적인 지역에서 서서히 여러단계를 거쳐 농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업이 중동지역에서 시작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여러 곳에서 독립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고 여겨집니다. 중동과, 중국, 그리고 중앙 아메리카이 농업의 기원지라고 여겨집니다. 이들 지역 외의 지역에서 농경이 시작되지 않은 이유는 농작물화와 가축화될 수 있는 식물과 동물이 한정적이고 특정 지역에서만 서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물과 동물이 있는 곳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농경이 시작된 근원이 진화에 따라 발전한 지능이 발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로 인간의 지능이 발전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농업을 통해 식량 생산량을 증가시켜주었지만, 불균형적인 영양과 더 적은 여가 시간을 남겨주어 인간의 삶의 질은 더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할 만합니다.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본다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여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밀을 재배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사피엔스의 몸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여러가지 질환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보면 밀이 사피엔스를 길들였다는 것이 더 타당해보입니다. 과연 사피엔스는 좋은 삶을 포기하고 절망적인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농업이 가져다준 장점 중에 하나는 같은 크기의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피엔스는 그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게 됩니다. 객체의 삶의 질과는 상관없이 복제된 DNA의 숫자로 진화적인 성공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로써 농업혁명은 각각의 개체들의 삶의 질은 떨어뜨리는 덫이 되었습니다.

 

The Luxury Trap

수백년 내치 수천년의 시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쳐 농경이 시작되었으로 보입니다. 사피엔스는 농업 없이도 오만년 동안 번성했었습니다. 호르몬이나 유전적인 요인으로 번식을 조절하여 자연적인 개체수 조절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개체수 조절은 문화적인 메커니즘으로 흡수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약 만팔천년전 전에 전지구적으로 날씨가 따뜻해지고 강수량이 많아지면서 밀과 기타 다른 작물들에 적합한 기후가 되어 자연적으로 밀이 많아지게 되었고, 밀을 채집해서 옮기는 과정에 땅에 떨어진 밀로 인해 밀은 더욱 더 번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밀이 풍부한 곳에는 사냥감과 다른 식물들도 풍부해서 인간들은 유랑 생활을 접고 계절별로 정착생할을 하다가 종국에는 완전한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정착생활과 아이들의 빠른 이유로 인해 여성들은 자주 임신이 가능해져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증가하는 인구는 높은 생산량의 농업이 가져다는 잉여 식량을 빠르게 소비합니다. 질병에 취약한 정착생활과 모유를 적게 먹게 되므로 낮아진 면역력, 식량에 대한 경쟁이 심화되면서 아동 사망율은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출생률이 사망률을 압도하면서 인구는 증가하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삶을 편하게 하려는 일련의 향상은 인간에게 오히려 굴레를 씌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내리는 결정의 궁극에는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단편적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변화들이 여러세대를 거치면서 사회를 변화시켜갔기 때문에 기존에 다른 방식의 삶을 경험한 사람이 없게 됩니다. 결국 인구의 증로 인간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고 일종의 덫에 갖히게 됩니다. 보다 편안한 삶에 대한 추구는 결국 더욱 힘든 삶이 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사치스러운 것도 한번 익숙해지면 그것이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이렇듯이 한번 정착해서 곡물을 경작해보게 되면 농업은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급격하게 증가하는 인구는 수렵채집을 하는 부족들을 몰아내게 됩니다.

 

Divine Intervention

인간들은 항상 편안한 삶을 추구하려고만 하지는 않고, 자아실현을 위해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 역사에서는 이데올로기나 문화와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된 증거가 없는 고대의 역사의 경우에는 유물론적인 해석이 더 많습니다. Gobekli Tepe에는 9,500년 전 수렵채집 사회에서 만들어진 무게 7톤의 높이 16 피트에 달하는 기념비와 같은 기둥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수렵채집 사회의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인상적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정도 규모의 구조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수의 부족의 수천명의 사람들이 상당 기간의 시간 동안 협동해서 일을 해야합니다. 어느정도 발전한 종교나 이데올로기 뒷받침해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Gobekli Tepe에서 20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물화된 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해야하는 하는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많은 양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전환했다는 해석을 해보면, 일반적으로 마을이 만들어지고 번성한 다음에 그 중간에 사원이 생긴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사원이 먼저 생기고 마을이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Victims of the Revolution

동물의 가축화해가는 과정의 첫번째는 장기적으로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번식이 가능한 암컷과 젊은 개체들을 보호하는 선택적인 사냥의 단계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포식자로부터 적극적으로 지키기 위해 통제와 보호가 용이한 좁은 공간에 모아두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보호와 통제하기 힘든 사납거나, 마르거나, 궁금증이 많은 개체들은 먼저 도축이 되면서 여러세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필요에 맞는 온순사고, 살이 많고, 궁금증이 적은 개체들만 남게 됩니다. 또다른 해석은 동물들을 잡아서 어느정도 기른 다음에 도축을 하는 과정에서 기르기 쉬운 순종적이고 매력적인 개체들만 남겨두면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순종적인 양들이 가축화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작물의 재배가 우선이고 동물을 키우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물을 활용하는 주로하는 새로운 유목사회도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축화된 동물들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 개체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게 됩니다. 진화적인 관점에서는 DNA의 숫자가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는 농업 혁명은 닭이나 소, 돼지 양들에게 훌륭한 혜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의 관점에서는 진화적으로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개체의 관점에서는 이들은 가장 불행한 생물체가 됩니다. 닭과 소들은 생후 단 몇주 혹은 몇달만 지나면 도축이 됩니다. 달걀을 낳는 암탉이나 우유를 생산하는 암소, 물건을 옮기는 동물들은 좀더 많은 기간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개체 역시 자신들의 희망에 반하는 비참한 삶을 그 댓가로 치뤄야 합니다. 동물들 역시 새끼를 가져야만 우유가 생산되는데, 생산된 우유가 새끼의 차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갓 태어난 새끼를 도축하는 것입니다. 우유의 생산량을 최대화하기 위해 어미는 계속해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만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새끼를 어미 옆에 두기는 하되 우유를 너무 많이 섭취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어미와 새끼의 저항이 심해서 위험할 수도 있는데, 간혹 죽은 새끼를 박제하여 어미 곁에 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새끼의 입주변에 가시 고리를 부착하여 어미로 하여금 수유를 꺼리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모두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양모를 얻기 위한 양이나, 애완용 개와 고양이, 전투용/경주용 말들은 제법 안락한 조건의 삶을 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해당 동물 개체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아마 농업혁명은 이런 가축화된 동물들 개체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재난일 것입니다. 이들에게 진화적인 성공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 종의 숫적인 증가는 엄청난 고통을 겪는 개별적인 개체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진화적인 성공과 개별 개체의 고통의 괴리는 농업혁명이 가져다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개인적인 견해

4장에서는 인류 혁신의 중요한 계기인 농업혁명에 대해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표현하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농업혁명으로 인한 생산성 증대가 이루어지면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발생합니다. 인구의 증가는 복제된 DNA의 숫자가 증가되므로 종의 관점에서 볼 때, 진화에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구의 증가는 인간을 힘든 농사일에 더욱 종속하게 만들어 개개인의 삶은 수렵채집 시절보다 더 비참해지게 된다고 합니다.

 

개개인의 삶이 비참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영양적인 불균형, 질병에 취약해짐, 더 고되진 노동의 강도, 여가 시간의 감소 등등이 제시됩니다. 이 부분들은 객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전반적인 삶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렵채집 생활의 문제점은 환경의 영향을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아, 겨울철이나 기후 이상이 오게 되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취약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상대적으로 농업은 향상된 생산력으로 잉여 식량을 저장하여 어려운 환경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어 상대적으로 수렵채집보다 비교우의에 있었을 것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진화적으로 유리한 것이 개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화를 거듭하면서 개체의 삶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유전자의 관점과 생존기계인 개체의 관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있어야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개미와 꿀벌 사회의 경우 유전자 유사성의 특이성을 바탕으로 일개미와 일벌들은 독립적인 삶보다는 사회를 위해 절대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분명 독특한 사회구조를 통해 유전자가 잘 보존되도록 진화적으로는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평생 번식도 못해보고 노동에 시달리고, 집단이 위험해주면 과감하게 자신을 희생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개체들의 관점에서는 과연 긍정적인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발하라리는 농업혁명과 함께 비참해진 것인 인간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가축화된 동물들의 비참함에 비하면 인간의 비참함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대부분 가축들은 인위적으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육되고 도축되면서 개체의 비참함은 말할 나위없이 비참해졌습니다. 역시 DNA의 양적인 증가라는 측면에서는 진화적으로는 성공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진화에 개체들은 희생이 되어진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인간과 가축의 개체들은 성공적인(?) 진화의 희생양인 된 것일까요?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밈으로 인해 인간은 어느정도 유전자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데요. 사피엔스를 읽어보니 그 유전자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주장에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유전자와 가축들의 유전자는 인간개체와 가축개체들이 비참한 일생을 바탕으로 진화적 안정상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개체들은 유전자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고민이 되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해보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육식에 반해 채식은 윤리도덕적으로 타당한가? 종의 개량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교배를 통한 개량에 비해 유전자 조작을 통한 개량은 어떻게 윤리도덕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는가? Beyond Meat과 같은 ESG 기업들의 대체육은 윤리도덕적 논쟁에서 자유로운가?

 

일반적으로 식물이나 신경조직이나 의식이 없는 동물들의 경우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생명을 취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아마, 먹이사슬이라는 생존을 지배하는 자연법칙과 윤리도덕률 안에서 고뇌하기 시작한 사피엔스가 고안해낸 법칙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특정한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제외하면, 이 법칙은 상대적으로 논란이 적은 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환경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최근 비욘드미트(Beyond Meat)와 같은 대체육이 각광을 받는 이유의 큰 부분이 육식에 대한 윤리도덕적 고뇌에서 비롯되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세포배양으로 일종의 고기를 재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화학적인 방법에 따라 고기를 합성하는 방법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대체 수단이 동물 개체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면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모든 부분에서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 타당하는 관점에서의 비판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의 개량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신념과 결부해서 원래 신이 디자인 세상이 완벽하기 때문에 그 어떤 종류의 비자연적인 개량은 종교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한편, 유전자를 기반으로한 종의 변화의 원리 역시 신이 인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도구라는 관점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한 개량 역시 종교윤리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관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