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균쇠 - 왜? 라는 질문을 던지자!

서평 2021. 1. 17. 21:17 Posted by 죠조

 

Guns, Germs, and Steel

저자: Diamond, Jared

출판: W.W.Norton&Company

발매: 2017.03.07.

 

이제는 은퇴하셔서 명예교수가 되신 지도 교수님은 고생물학개론 첫 강의에서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늘 강의 내용에서 나는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그 누구도 오늘의 이야기들을 검증을 할 수 없을테니깐..." 비록 주입식 교육에 찌든 우리들이었지만, 교수님의 그 말씀이 지구의 생성에 대한 강의 내용을 일방적 받아들이라는 강요가 아니었다는 것 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권위가 주는 부담을 덜어주신 교수님 덕에 학부 2년차의 학문적 유년기의 우리들은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대한 강의 내용들에 마음껏 "왜?"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왜?"라는 질문은 우리들을 좀더 적극적이고 깊은 사고의 과정으로 몰아넣어 공부하던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우리의 사고 체계에 견고하게 착상시켜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 기억은 강하게 여운을 남긴다.

 

생각과 지식을 정리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이고 조리있게 하는 편은 아니어서 토론에 능하지 않지만, 나는 주변사람들과 사상과 지식의 교제를 나누기위해 토론을 즐긴다. 특정 주제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토론을 하다보면, 평소에 내가 당연시 했던 고정 관념들의 이면을 들추어보게 되는 된다. 다른 의견을 바탕으로 나의 전반적인 삶을 떠받치는 생각들을 재검토하고 다듬는 것만큼 토론이 주는 유익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론을 하다가 맞이하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들도 적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접한 주장이나 사상들을 심사숙고하여 평가하는 과정없이 받아들이, 사상누각을 만들듯이 그 위에 자신들 사고의 결과물들을 쌓아올린다는 점이다. 그런 현상들은 결국은 여러 편견들의 시발점이 되어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다양한 정보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한번 더 그 이면을 생각해보는 것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우리의 사고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중요한 덕목라고 여겨진다. 단지 편견의 틀에 갇히지 않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남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우리의 생각의 나래를 드리워 종국에는 새로운 시각과 사고를 제공할 수 있는 창의성의 발단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토론 중에도 상대방의 주장에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대부분의 답변은 어떤 책이나 신문의 사설에서 읽었다이거나 최근 발단된 SNS나 YouTube 방송을 통해 알게되었다면 나는 다시 한번 그런 미디어의 정보들의 권위가 타당한지 검증해보자고 한다. 그런 시도가 거부되면 물론 토론은 거기서 거의 마무리가 되고, 그럴때마다 나는 새로운 창의적인 생각들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다는 진한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그런 면에서 수많은 비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총균쇠가 참으로 용감히 우리에게 역사의 새로운 영역의 초석을 마련한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현재의 국제 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류 문화사 중심의 역사관에서는 몇가지 권위적인 사고들이 근간이 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세계의 현대화를 이끌어낸 서구 백인들의 상대적인 우월함에 대한 가정일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우월한 백인들은 훌륭한 문화를 만들어 합리적인 사회체제를 확립하여 과학적인 발명에 약진하여 종국에는 상대적인 약자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나 아시아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현대사의 단편들만보면 어쩌면 당연할 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뉴기니 친구 얄리 덕에 당연한 역사학의 명제에 또 한번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왜 서구 백인들은 보다 나은 문화와 사회체계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약진할 수 있었을까?"라는 이 새로운 질문은 저자의 창의성을 자극하게 된다. 그런 저자의 창의성은 그가 익숙한 과학적인 방법을 바탕으로 한 논증으로 집약되어 이 총균쇠라른 서적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임계장 이야기(우리시대의 논리 27)

저자 조정진

출판 후마니타스

발매 2020.03.30.

 

이 책은 38년간 공기업에서 근무했던 저자가 퇴직한 이후, 생계를 위해 여러 임시 계약직 일자리에서 겪은 일들을 수기 형식으로 기록한 일종의 르포타쥬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정년 퇴직을 한 이후 안락한 노후를 기대하던 저자는 예상치 못한 아들의 뒤늦은 대학원 진학을 지원하기 위해 다시 직업 전선으로 뛰어든다. 나이든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는 열악한 근무 환경과 기본적인 노동권도 보장되지 않는 시급제 임시 계약직 밖에 없다. 첫번째 버스회사 배차요원, 두번째 아바트 경비원, 세번째 빌딩 경비원과 아파트 경비원의 겸업, 그리고 네번째 고속버스 터미널 경비원으로 겪게되는 일들과 저자의 생각들을 책은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르포타쥬 형식의 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르포타쥬 형식의 글을 읽다보면 깊은 사고없이 책에서 주어지는 내용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거라면 차라리 티브나 유튜브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편, 저자의 자기 중심적인 시각과 이해하기 힘들 결정 등을  보는 것도 불편했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한 아들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취업을 결정한 것 저자의 결정도 공감하기 힘들었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최소한의 생계의 수단으로 표현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튼 책 속에 등장하는 저자 주변의 갑질을 일삼는 무례한 사람들과 저자의 공감하기 힘든 행동들로 인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기대했을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답답한 마음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여러가지 부정적인 면면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 속에 묻어나는 세상의 불합리를 외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은 부의 총합과 공리의 극대화를 가능케한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생산자들은 경쟁의 과정을 통해 생산성을 확대하여 소비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재를 공급해주며, 노동자들 역시 경쟁을 통해 건전한 노동시장을 제공하여 생산자들의 안정적인 기업활동이 가능하게 해준다. 바로 이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이 현재 인류 사회가 누리고 있는 번영의 일등 공신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쟁은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임시 계약직 노인장들을 양산해내는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늘어만가는 고령 노동자들은 한정된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을 심화시켜 고용관계에서 불리한 상황을 악화시킬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저자의 취업은 다른 노동자의 손쉬운 해고와 연결이 되어있었고, 저자의 해고도 결국 손쉬운 대체인력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그 경쟁의 냉혹함에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건전한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에 따른 차등적인 대우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쟁의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한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충분한 노력과 준비를 하지 않아 자업자득으로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이나 사회적 혜택에서의 소외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불운함으로 인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노력과 준비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문제나 상황적인 문제로 인해 한 개인이 고통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는 분명 도덕적 담론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의 기간이 길어지거나 정도가 과도하다면 이 또한 도덕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커다란 성공이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기술발전과 자원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결국 생존을 위한 생산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게 될 것이고, 생산에 종사하는 시간의 감소는 인류의 여유시간을 늘려, 자본주의 핵심 요소인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에 대한 도덕적 담론을 활성화시켜준다. 인류는 자본주의보다 도덕적 우위인 사회주의나 다른 경제 시스템을 채택하여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슘페터의 이야기처럼 도덕적으로 우월한 시스템이 언젠가는 오겠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과정의 긴 시간 동안에 나타날 인간들의 고통의 총합은 너무나 과도해보인다. 평등의 정신에 입각하여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도덕적인 담론으로 그들의 고통을 쓰다듬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페스트 -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서평 2020. 11. 16. 19:07 Posted by 죠조

PLAGUE

저자알베르 카뮈

출판VINTAGE

발매199105

 

코로나, 인종차별문제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관통하는 미국 사회는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에게 이질감을 심화시켜준다.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일부 국민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과연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인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문제의 해결과정을 바라보자면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인인 나와 내 가족들이 미국사회 속에서 과연 공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희대의 대통령이 써내려가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역사는 그가 그전에 보여준 행동들이 백신처럼 작용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한인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냉철한 상황 판단 없이 대선 조작의 음모론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 반응할 기력마저 쇠하여져 나의 의식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 무기력의 본질은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그 원인임일 것이다. 그 난해함은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한 단계 더 높은 고전의 단계로 상승해가고 있는 카뮈의 페스트는 어린 시절 힘들게 읽었으면서 느꼈던 어렴풋한 기억들과 연결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독서 토론 모임에서 페스트를 같이 읽기를 제안했고, 몇몇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페스트를 읽고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대해 토론을 즐기며, 카뮈가 경험했을 부조리한 세상과 그가 걸어갔던 길을 반추해보았다. 페스트를 통한 카뮈의 주장이 너무나 명확한 것인지, 토론을 함께한 우리들이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탓인지 토론은 어쩌면 자명한 결과로 타루나 리외, 그랑, 카스텔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히하며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성실히 행하여야 한다는 훈훈한 결론에 손쉽게 도달하였다.

그런 토론의 훈훈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교인인 나로서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의식의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페스트 안에서 그려지는 파늘루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성당으로 모여들었으며, 파늘루 신부는 하나님깨서 애굽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인용하여 오랑시의 페스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온전케되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는 기독교 신자인 나의 입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 없으나, 그 어떤 시련들도 결국에는 합력하시는 선을 통해 결국에는 우리가 정금과 같이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린 오탕의 아이의 심히 고통스런 죽음의 과정에서 부여주는 의사 리외의 파늘루 신부님에 대한 항의를 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지성을 갖추고자하는 한 인간의 관점에서 동감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한번 그 섭리에 대한 동의에 대해 도전을 만들어낸다.

코로나와 인종차별, 그리고 미국 대선의 관통하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 역시 같은 교인임에도 받아들이기 곤란한 일들로 가득하다. 초기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공포 속에서 도시가 폐쇄되는 모습을 보며, 선교사들을 억압하는 중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교인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런 주장을 하던 분들이 코로나 창궐의 정점을 달리는 미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하지 않는 모습에는 부당함을 느껴졌다. 더 나아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항의 시위와 관련된 약탈에 대한 문제점으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세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들은 의식의 무기력을 키워낸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공유하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모습에 이르게되면 무기력이 절망감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교회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아래 교회가 사회에 대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고민하고 기도 속에서 그 일들을 해내야한다고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발전하여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이라는 시대 사조를 조롱하는 듯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카뮈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와 인종차별, 그리고 희대의 대통령과 그의 재선에 관련된 일들 속에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전체적으로 깨닫는 것은 아마도 개개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조리 속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자원 봉사대를 꾸리는 타루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와 그랑, 카스텔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또 교회가 해야할 일들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해야하는 또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들은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에서는 페스트 창궐 속에 살아남은 자들에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상봉만이 유의미하게 남고, 타루와 같은 이웃 사랑의 실천의 희생에 대한 교훈의 자취는 덧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관념적인 논쟁에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코로나와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는 이웃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노력이 세상에 덧없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것을 두번째 계명으로 주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소망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 보다는 사회에 대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올바로 서는 것에 있기를 소망해본다.

노아 홍수 콘서트

저자 이재만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2009.04.17.

 

나는 학부로 지질학을 공부했고, 제대로 시작도 못했지만, 석사과정을 공부할 요량으로 고생물학 연구소에서 3년간 공부를 하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신앙 생활 초기부터 몇몇 사람들로부터 성경 대 지질학 혹은 진화론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믿는다면 46억년이란 지구의 나이를 제시하는 지질학이나 진화의 과정을 걸쳐 지금의 생태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진화론은 틀릴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몇몇 분들은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이 제시하는 나름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지질학이나 진화론은 잘못된 학문이며, 홍수 격변론이 더욱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잘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내가 연구하고 있는 지질학은 무신론에 기인한 잘못된 패러다임으로 인해 계속 진리와 괴리되는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학부를 마치고 3년간 고생물을 연구하면서 얻은 짧은 지식만으로도 그들의 과학적인 증거들이 편향된 시각에 의도에 의해 취사선택이 되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성령님의 주관하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족한 나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그분들의 영향으로 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했던 지질학으로 인해 세상의 잘못된 패러다임에 빠져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믿기 힘든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뉴턴의 진리의 바닷가의 돌과 조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참된 학자의 자세는 학문적인 겸손함으로 세상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되뇌여보았지만, 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꺼져가게 되었다. 마침 IMF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경제 상황으로 많은 학생들이 좁은 취업의 과정에서 자신의 전공을 바꾸는 틈에 나도 고생물학을 더 이상 업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신앙과 과학의 그 지난한 논쟁이 나의 삶에서 비껴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내가 의도적으로 안락한 신앙 생활을 위해 몰이성과 반지성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지성과 이성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받은 것인데, 그 이성과 지성에서 오는 도전들도 우리가 주님 안에 온전케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그 지성과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하는 나태함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나태함들이 극단적인 근본주의와 독단적인 교조주의가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모습을 방관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대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특별히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진화론의 패러다임에 물들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교회 안에 팽배한 신학적인 오만함, 학문적인 몰이해, 문화, 사회적인 괴리감, 그리고 위선적인 신앙생활들이 우리를 침몰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런 창조과학과 궤를 맞대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그것을 옹호하는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성도들 사이의 대화의 단절을 꿰하고, 심한 경우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상황으로 내몰아간다. 상대적인 비기득권자인 젊은이들이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남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교회에서 창조과학 세미나 행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의 덕이 되기 위해, 그냥 조용히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외면하려던 마음이 습관처럼 올라왔다. 기도 중 과연 그것이 교회의 덕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참여한 세미나의 내용은 역시나 20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리한 논리전개, 오류 투성이의 실험, 왜곡된 문헌 인용 및 해석, 학문적 교만을 바탕으로 거의 기만에 가까운 세미나였다. 그나마 자유로운 질의 응답마저 불가능하여 참다 참다 세미나 중간에 질문을 던졌다. 아마 교회에 두고두고 회자될 듯하다.

그러나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이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던 목회자들마저도 10년이 넘게 함께 생활한 성도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책의 내용은 ... 예전에 정말로 서평쓰려다가 책낼뻔한 경험이 있다. 책의 내용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저자 최진석

출판 21세기북스

발매 2018.08.13.

 

읽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다. 토론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할 책으로 선정이 된 이후에 인터넷에서 책에 대한 후기와 저자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해주었으며, 저자 역시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학교의 설립을 위해 20년간 재직했던 유명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이력으로 인해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는 도중에 그리고 읽고 나서도 실망이 컸던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주요 메시지인 사유 행위로서의 철학라던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위한 필요한 자세들이 규정된 철학적 시선의 정의에 대해서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전반적인 서술 과정 대부분은 논거의 부족과 논리적 비약을 드러내고 있어서 동의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 논거의 부족과 편협한 해석들도 대부분 낡은 식민사관이나 문화사대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시선이 과연 좀더 나은 사고를 하는데 있어 어떤 효용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책은 일반적으로 장이 아닌 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아마도 이 책의 기본 골격은 강의안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체 5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1강에서 4강 까지가 실질적인 책의 내용이고, 마지막 강은 질의에 대한 저자의 답변들이 담겨있다. 1강 부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철학은 살아있는 사유이고 행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해서, 중국 근대사를 예로 들어 문화, 사상, 철학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강 선도에서는 철학적인 시선을 갖추어 선도와 창의력을 발휘해야 선진국으로 도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3강 독립에서는 베이컨이 이야기하는 우상들에서 벗어나 니체가 이야기하는 독립적 주체로 관찰과 몰입을 통해 세상의 현상들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4강 진인에서는 다시 한번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 덕을 통해 자신을 이겨내어 지성을 완성시켜나가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철학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지말고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이 시대에 철학을 단순히 철학 이론들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다 합리적인 철학적인 사고를 위해, 보편타당한 철학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철학 이론들을 공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적절한 지식 기반 없이 사고의 과정에 뛰어들게 되면 철학을 했다는 나름대로의 정신승리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고 결과의 수준은 자못 뻔하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철학 이론 습득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일 수 있다. 나 역시도 그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가 표현하듯이 그것이 훈고적, 후진적 이며 낮은 시선이라 극단적인 평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합리적인 철학이라는 행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한편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주장 자체가 참신한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에서 철학적 사고에 방해가 되는 우상들을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학적인 방법론을 면밀히 따져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행위로서의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저자가 정의하는 철학적 사유의 시선들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시라토리의 “니체의 말"이라는 책을 보면 대부분 니체가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저자가 책에서 베이컨이나 니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난감하다. 저자가 수십년간 유명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셨다고 하던데, 베이컨이나 니체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다.

일단,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자의 주장들에 논거의 결핍, 논리적 비약, 그리고 관념적인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읽다가 보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이 너무 많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토론 모임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없었다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강과 2강에서 언급되는 중국, 일본, 한국의 근현대사 분석 부분이 가장 답답했다. 중국과 일본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을 가져 선진국의 길을 갈 수 있었고, 한국은 낮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으로 인해 식민지를 거쳐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그렇다쳐도, 중국은 언제부터 선진국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은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당시 최신식 철학인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해서 결국은 선진국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한다.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중국이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했었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그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수입한 북한과 베트남은 왜 아직도 선진국이 되지 못했는가? 한편, 중국이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졌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것도 어느 한 도사(도교의 성직자)와의 대화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입증하는 다른 논거들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가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져보지 못하고 남의 것을 무작정 베끼기만 하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중진국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근대사 부분에서 조선 시대를 낮은 수준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도 역시 수준이 낮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수준의 높낮이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성공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면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인 것이고,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수준이 낮은 것인지 묻고 싶다. 개인적인 근현대사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19세기까지 조선은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국가를 유지했으나 서구 열강의 야만적인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신민지화가 되었다. 그 안에도 실학운동이나 계급운동과 같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계 정세는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이 보다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을 삼키어, 조선은 식민지 종속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나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철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사회 내부에서 채택되거나 논의되어 왔었다. 유래 없을만큼 다양한 사상들의 충돌 자체만으로도 이미 수준 높은 철학적인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나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과 같이 시각을 달리하면서 국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고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경제적, 과학적, 군사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으며, 더불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기에는 이르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솔직히 발전의 원동력은 수준높은 지식 기반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력과 군사력의 성장이지 않을까 싶다. 중국도 마찬가지이고,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한 유렵도 그랬을 것이고, 미국도 동일한 이유로 패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그토록 주장하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발휘해야하는 창의성의 문제에도 이견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창의성의 발현은 창의적인 사람들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반 환경과 그 창의성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창의성의 근간이 되는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치자. 그 사람들이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는 학교, 직장이나 단체가 없다면 질문이 창의성으로 연결이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주장대로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창의성이 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특정 기업이나 단체들이 사회 시스템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 창의의 결과들을 제대로 수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창의적인 인재들을 아무리 많이 양성해봐야 결국에는 그 창의의 결과물들은 사장되고, 그 인재들의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회, 질좋은 창의의 결과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사회구조가 이루어지면 굳이 창의성을 가진 인재들을 양성하지 않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은 창의성을 획득하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식의 습득과 현실 문제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시선의 방법론들은 관념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설명이 너무 많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고의 전개 과정에서 보편타당성을 검증하는 부분들이 결여되어있어 저자의 방법론을 택한 사람들은 쉽게 베이컨이 이야기한 우상들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너무 심한 확대 해석 혹은 비약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부족한 논거, 편협한 해석, 심각한 단순화들이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관찰, 측정, 실험,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으로 구성된 과학적 방법론이 우리의 인식, 가치체계, 자연현상 등을 탐구하는데 적합하다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철학적인 시선은 “관찰, 측정, 실험”의 중요성을 매몰하고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의 중요성만 강조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 세태가 “관찰, 측정, 실험”에만 몰두하며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에 익숙하지 않아 철학적인 시선이 중요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한가지 명심해야할 것은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고 섣부른 일반화는 현실과 동떨어지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시험과 가설들을 양산하여 불필요한 사회적인 에너지의 낭비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모임에서의 토론 과정이 심화되면서 이 책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어 좀 감정적인 서평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뚜렷한 과점을 가지고 책을 읽기를 권한다. 관념적인 단어들로 가득찬 저자의 서술과 주장들은 현실성을 가리워서 독자를을 쉽게 현혹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저자 나쓰메 소세키

출판 이레

발매 2008.05.20.

 

백년이 지난 후에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 소설이다. 그러다보니 이 한편의 소설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주인공에게 당연히 중요한 아버지의 죽음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선생님의 죽음에 매개체는 천황의 죽음에 대한 노기 장군의 순사라는 것과 소세키 생전의 발언들을 중심으로 황국신민화를 꾀하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자살을 감행하는 선생님과 그의 친구 K의 죽음과 마지막까지 아내를 걱정하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비시켜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져야하는 기본적인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가히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어린 시절 부모와 원만한 관계와 사랑을 나누지 못해서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선생님과 K와 아버지에 대한 원만한 사랑의 관계를 소유한 주인공과 대비하여 부모 자식 간이 사랑이 중요함을 설파한다는 해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방향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짚어놓을 수 있을만큼 이 소설의 필치가 대단함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실로 주인공의 독백과 선생님의 유서는 그들의 마음 속 내면 깊은 곳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유려한 서사시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누구나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 의식과 지켜고 싶어하는 개인의 실질적인 삶의 현실에서의 괴리감에 고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괴리감을 느낄 때면,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낙담 비슷한 것을 느끼며 고뇌와 죄책감에 빠져들게 된다. 표리부동하고 부조리하거나 무능력한 세태를 내 의식에 각인되어있는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면서 느끼는 감정에는 과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 것일까? 남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가져다 대는 것처럼 한치의 변명도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나에게도 그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 마태복음 26장에 나온 예수님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이런 우리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습성이라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결한 마음의 눈으로 부족한 우리 삶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까?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선생님은 자신을 기만했던 숙부를 정죄했던 그 고결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이기심으로 친구를 기만한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면서 결국 낙담과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고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마음의 눈이 현실의 삶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직시함이 만들어낸 고뇌들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아버지와 같이 우리들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책임감이 그 고뇌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전반부는 우연히 알게 된 무기력한 현실을 살아가는 고고한 학식의 소유자인 선생님을 마음 속에서 존경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서술로 시작된다. 중반부에서는 주인공은 병환으로 위독해져 죽음에 다다른 아버지를 돌보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신의 마음에 고뇌를 시작한다. 종반부는 소설의 핵심으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선생님의 유서형식으로 씌여진 자서전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자신을 기만한 숙부에 대한 증오로부터 시작된 염세적 사고, 하숙집 아가씨와 사모님과의 인간적인 교제로 인해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 친구 K와 하숙집에서의 동거, 그리고 아가씨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K와의 갈등. 결국 아가씨를 자신이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으로 친구를 기만하는 선생님은 K의 자살로 충격을 받고, 그 후 자신에 대한 변호로만 일관하는 자신의 행동에 낙담하게 된다. 아가씨와의 결혼으로 삶을 바꾸어보려했으나 오히려 아내는 K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게 만들었고, 그는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의 예의를 지키며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된다. 결국 천황의 죽음과 노기 장군 부부의 순사를 핑계로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설국 - 부질없는 일들에 대한 관대함

서평 2020. 7. 16. 19:53 Posted by 죠조

 

설국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출판 민음사

발매2002.01.31.

 

인생의 부질없는 면면들을 들춰내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인생 속에의 부질없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밥벌이 수단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전공했던 지질학에 대한 대학 시절의 그 넘치던 열정은 모두다 부질없는 것이리라. 인적은 커녕 길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강원도 험한 산 속을 떠돌면서 남들 눈에는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 샘플들을 소중히 모아가며 고생했던 그 시절을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이 헛수고라 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 같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과 그와 함께 떠내려가는 내 삶을 돌아보면 학생운동 시절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그 열정이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는다. 어쩌면 40 중반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 돌아보는 인생에는 참으로 부질있는 일들보다 부질없는 일들의 자리가 더 많은 듯 하다.

그런 일종의 회한과 반성 같은 것들로부터 나름 인생의 교훈이라고 습득한 것일까? 자연스레 어느덧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40 중반에도 아직도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열정의 기력이 쇠하지 않은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중학생인 딸에게는 모든 삶의 요소들이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으로 가는 것과 잘 정렬이 되어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것들은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잔소리 꾼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는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에 사활을 걸려고 하는 부하 직원들의 부질없음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게 된다. 나는 이제 깨달았다는 교만함일테다. 주위 사람들 속의 삶에서 발견하는 그 부질없음들을...

소설 속 고마코의 부질없는 일들에 대해 헛수고라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시마무라의 생각에 동화되면서도, 책임을 져야할 처자식을 버려두고 고마코를 만나러 온천장 마을로 매년 발걸음을 하는 부질없는 시마무라도 판단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고마코에게 차마 헛수고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시마무라를 보면서 일종의 공감을 느끼게 되어 그냥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냥 그렇게 있는 설국의 눈과 은하수와 아름다운 산들처럼, 우리의 부질없는 일들도 그렇게 있을 수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 부질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외딴 산골의 한낱 게이샤인 고마코가 그리고 요코가 시마무라에게 남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도 모두 그 부질없는 것들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렇게 좀더 넓은 마음으로 내 인생의 부질없던 일들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으로 내 주변 사람들의 부질없음을 품어주면 그들의 아름다움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

한편이 서정시와 같은 이 소설은 일상들의 면면을 그려낸 영화와 같은 소설 천변풍경과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이 없다.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리는 온천장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와 동네 처녀 유코, 그녀들을 찾는 시마무라가 그냥 등장한다. 시마무라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그곳의 자연과 고마코, 유코의 아름다움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와 유코의 헛수고들과 어울려 그려지고 느껴진다. 게이샤에게는 필요 없는 고마코의 문학에 대한 동경과 글쓰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유코의 헌신, 가정이 있는 시마무라의 그녀들에 대한 감정, 그 모두가 헛수고일 것이다. 그 헛수고들이 그곳의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냥 담담히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냥 존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생의 중요한 본업과 관련이 없는 그 부질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는 넓은 아량을 소설의 말미에 독자에게 선사하는듯 하다.

나의 한국현대사 - 나만의 한국현대사

서평 2020. 7. 16. 17:53 Posted by 죠조

 

나의 한국현대사

저자 유시민

출판 돌베개

발매 2017.02.07.

 

1987년 겨울 있었던 대통령 선거쯤에 중학생이었던 나는 친한 친구의 누나를 통해 내가 알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 다른 이면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이면은 당시 너무나도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와 어린 나의 사고체계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나의 의식 세계 한쪽에 자리잡혔다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다. 5년뒤 역시 겨울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대학생 신분으로 바라보았다면 나의 대학생활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나는 대학 입시 재수생으로 공부에 허덕이고 있느라 평생을 군사독재에 대항해 싸워왔던 정치인이 그 군사독재 정권과 야합하여 대통령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아무런 감정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1997년의 겨울의 대통령 선거는 한때 치열했다가 식어가던 나의 올바른 사회에 대한 열정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우리 사회가 이루어낸 기적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암울하고 지난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온 희망찬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다.

그 희망과 식어가는 열정은 나에게 현실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먹고사는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온 미국에서 바라본 2007년 대통령 선거 결과는 대한민국에 대해 내가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은 미국이라는 타국에서 생활하는 나의 관심과 신경을 잠재우기 충분하였다. 2016년 겨울까지는... 2017년 새로운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의 친구였던 2002년의 대통령을 떠올린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따랐던 2002년을 출발점으로 하는 궤적이 2017년의 그것과 다르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미국에 살기는 해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 특히 그 현대사에 강렬한 갈증과 같은 관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관심의 시점이 심히 감정적임을 깨닫고, 그 감정의 근원들을 관조해보기로 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내가 감정들을 잠잠히 들여다보는데 도움을 주었다. 학생 운동시절부터 현실 정치까지 적잖은 열정과 감정으로 살아왔던 유시민 작가의 관점에서 바라보여지는 한국 현대사의 면면들을 보면서 내가 나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인내하는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서리라. 해방이후 2012년의 대통령까지의 현대사를 바라보면서 어찌 그가 감정에 동요가 없을 수 있겠는가? 모두가 아는 정답이듯이 그것을 다스리며, 솔직하게 서술하는 한국 현대사의 모습들을 하나씩 바라보는것 만으로도 가치가있는 책인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이 책에 드러난 사관과 사건들을 일일이 평가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다른 감동이 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탁류

저자 채만식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4.01.22.

 

책을 읽는 동안에 주인공을 둘러싼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너무나도 훌륭한 묘사는 익숙하지 않은 구어체의 글로부터 오는 거리감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에 동화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친일작가의 글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나만의 선입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과 부정의한 환경 속에서 파괴되어가는 주인공의 삶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한껏 비통한 마음 속에 돌려 일제 강점기의 고단했었을 선조들의 삶이 보이는 것 같아 그 안타까움이 더해간다.

주인공도 한탄했듯이, 죄없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인생의 억울함들은 그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세상의 죄가 스며들어 인간들 사이의 흙탕물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그 탁류를 모름지기 받아들여야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의 형이상항적인 섭리에 따르면 다 덧없는 일이라며 나름 초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인가?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질문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몰락한 인텔리 정주사의 첫째딸은 초봉은 축복이어야 하지만 저주가 되어버리는 미모를 가졌다. 그 저주는 타락해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쾌락을 찾던 태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태수와 정주사 부부의 불순한 결혼에 대한 동기는 가족을 위한 희생의 대의 명분으로 바뀌어 결혼에 대한 마땅한 초봉의 고민을 잠재워 초봉의 인생의 첫번째 흙탕물을 일으킨다. 태수의 불순한 이기심 곁에는 더욱 노골적이며 천박한 형보의 불손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형보는 태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초봉을 겁탈한다. 태수의 죽음과 형보의 욕망을 겪으며 당황, 분노 그리고 절망에 이르던 초봉은 가족의 지독한 빈곤 앞에 서울로 떠날 결심을 한다. 하지만, 서울 가던 중 아버지 친구인 제호를 만나게 되고, 친구의 딸임에도 자신의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 몰양심의 제호를 세세한 고민없이 따라가서 막다른 골목에서 이번에는 포기하다시피 제호의 첩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송희라는 아이를 낳았으나 세명 중 아버지를 특정치 못하는 상황에 초봉은 당황해하지만, 손안의 자식은 초봉의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어간다. 결국 송희는 제호가 초봉을 버리게 되는 경로의 시작점이 되며, 절대 혐오의 대표인 형보가 초봉을 인생째 겁탈하게되는 매개체가 된다. 인생의 우상을 볼모로 잡혀버린 초봉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쇠락해가는 인생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결국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자살 이후의 걱정거리들을 없애기 위해 형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대로 되지 않고 우발적으로 형보 살해의 목적을 달성했을때, 첫사랑 승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재의 등장으로 초봉은 자신의 삶의 처참한 회환을 느끼면서 동시에 희미한 희망도 보게 된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서곡이다.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서곡이라했을까? 이제 탁류가 그치고 초봉의 인생의 강물이 맑게 되는 서곡이지! 라고 착하고 낙천적인 생각으로만 받을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어쩌면 인생의 탁류의 시작의 서곡이지! 라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취할까? 아니면, 한차례 세찬 탁류를 경험한 헝클어진 초봉의 인생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승재나 계봉의 탁류의 시작의 서곡이지! 라고 해설적이며 관조적으로 받아야할까?

인생의 나름의 원칙을 세우면서 살아가는 승재와 계봉, 그리고 쓸려가는데로 자신의 원칙보다 현실에 타렵하는 초봉을 대비해보면서 삶속에 분명한 나의 입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러기 위해 나의 현재의 한 순간 순간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으면 우리의 인생 역시 험한 탁류에 휩쓸린 초봉의 인생이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