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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서평 2020. 11. 16. 19:07 Posted by 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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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GUE

저자알베르 카뮈

출판VINTAGE

발매199105

 

코로나, 인종차별문제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관통하는 미국 사회는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에게 이질감을 심화시켜준다.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일부 국민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과연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인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문제의 해결과정을 바라보자면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인인 나와 내 가족들이 미국사회 속에서 과연 공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희대의 대통령이 써내려가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역사는 그가 그전에 보여준 행동들이 백신처럼 작용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한인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냉철한 상황 판단 없이 대선 조작의 음모론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 반응할 기력마저 쇠하여져 나의 의식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 무기력의 본질은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그 원인임일 것이다. 그 난해함은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한 단계 더 높은 고전의 단계로 상승해가고 있는 카뮈의 페스트는 어린 시절 힘들게 읽었으면서 느꼈던 어렴풋한 기억들과 연결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독서 토론 모임에서 페스트를 같이 읽기를 제안했고, 몇몇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페스트를 읽고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대해 토론을 즐기며, 카뮈가 경험했을 부조리한 세상과 그가 걸어갔던 길을 반추해보았다. 페스트를 통한 카뮈의 주장이 너무나 명확한 것인지, 토론을 함께한 우리들이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탓인지 토론은 어쩌면 자명한 결과로 타루나 리외, 그랑, 카스텔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히하며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성실히 행하여야 한다는 훈훈한 결론에 손쉽게 도달하였다.

그런 토론의 훈훈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교인인 나로서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의식의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페스트 안에서 그려지는 파늘루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성당으로 모여들었으며, 파늘루 신부는 하나님깨서 애굽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인용하여 오랑시의 페스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온전케되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는 기독교 신자인 나의 입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 없으나, 그 어떤 시련들도 결국에는 합력하시는 선을 통해 결국에는 우리가 정금과 같이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린 오탕의 아이의 심히 고통스런 죽음의 과정에서 부여주는 의사 리외의 파늘루 신부님에 대한 항의를 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지성을 갖추고자하는 한 인간의 관점에서 동감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한번 그 섭리에 대한 동의에 대해 도전을 만들어낸다.

코로나와 인종차별, 그리고 미국 대선의 관통하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 역시 같은 교인임에도 받아들이기 곤란한 일들로 가득하다. 초기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공포 속에서 도시가 폐쇄되는 모습을 보며, 선교사들을 억압하는 중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교인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런 주장을 하던 분들이 코로나 창궐의 정점을 달리는 미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하지 않는 모습에는 부당함을 느껴졌다. 더 나아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항의 시위와 관련된 약탈에 대한 문제점으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세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들은 의식의 무기력을 키워낸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공유하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모습에 이르게되면 무기력이 절망감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교회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아래 교회가 사회에 대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고민하고 기도 속에서 그 일들을 해내야한다고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발전하여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이라는 시대 사조를 조롱하는 듯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카뮈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와 인종차별, 그리고 희대의 대통령과 그의 재선에 관련된 일들 속에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전체적으로 깨닫는 것은 아마도 개개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조리 속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자원 봉사대를 꾸리는 타루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와 그랑, 카스텔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또 교회가 해야할 일들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해야하는 또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들은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에서는 페스트 창궐 속에 살아남은 자들에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상봉만이 유의미하게 남고, 타루와 같은 이웃 사랑의 실천의 희생에 대한 교훈의 자취는 덧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관념적인 논쟁에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코로나와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는 이웃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노력이 세상에 덧없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것을 두번째 계명으로 주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소망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 보다는 사회에 대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올바로 서는 것에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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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저자 나쓰메 소세키

출판 이레

발매 2008.05.20.

 

백년이 지난 후에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 소설이다. 그러다보니 이 한편의 소설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주인공에게 당연히 중요한 아버지의 죽음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선생님의 죽음에 매개체는 천황의 죽음에 대한 노기 장군의 순사라는 것과 소세키 생전의 발언들을 중심으로 황국신민화를 꾀하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자살을 감행하는 선생님과 그의 친구 K의 죽음과 마지막까지 아내를 걱정하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비시켜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져야하는 기본적인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가히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어린 시절 부모와 원만한 관계와 사랑을 나누지 못해서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선생님과 K와 아버지에 대한 원만한 사랑의 관계를 소유한 주인공과 대비하여 부모 자식 간이 사랑이 중요함을 설파한다는 해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방향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짚어놓을 수 있을만큼 이 소설의 필치가 대단함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실로 주인공의 독백과 선생님의 유서는 그들의 마음 속 내면 깊은 곳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유려한 서사시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누구나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 의식과 지켜고 싶어하는 개인의 실질적인 삶의 현실에서의 괴리감에 고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괴리감을 느낄 때면,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낙담 비슷한 것을 느끼며 고뇌와 죄책감에 빠져들게 된다. 표리부동하고 부조리하거나 무능력한 세태를 내 의식에 각인되어있는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면서 느끼는 감정에는 과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 것일까? 남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가져다 대는 것처럼 한치의 변명도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나에게도 그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 마태복음 26장에 나온 예수님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이런 우리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습성이라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결한 마음의 눈으로 부족한 우리 삶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까?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선생님은 자신을 기만했던 숙부를 정죄했던 그 고결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이기심으로 친구를 기만한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면서 결국 낙담과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고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마음의 눈이 현실의 삶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직시함이 만들어낸 고뇌들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아버지와 같이 우리들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책임감이 그 고뇌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전반부는 우연히 알게 된 무기력한 현실을 살아가는 고고한 학식의 소유자인 선생님을 마음 속에서 존경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서술로 시작된다. 중반부에서는 주인공은 병환으로 위독해져 죽음에 다다른 아버지를 돌보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신의 마음에 고뇌를 시작한다. 종반부는 소설의 핵심으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선생님의 유서형식으로 씌여진 자서전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자신을 기만한 숙부에 대한 증오로부터 시작된 염세적 사고, 하숙집 아가씨와 사모님과의 인간적인 교제로 인해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 친구 K와 하숙집에서의 동거, 그리고 아가씨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K와의 갈등. 결국 아가씨를 자신이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으로 친구를 기만하는 선생님은 K의 자살로 충격을 받고, 그 후 자신에 대한 변호로만 일관하는 자신의 행동에 낙담하게 된다. 아가씨와의 결혼으로 삶을 바꾸어보려했으나 오히려 아내는 K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게 만들었고, 그는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의 예의를 지키며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된다. 결국 천황의 죽음과 노기 장군 부부의 순사를 핑계로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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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 부질없는 일들에 대한 관대함

서평 2020. 7. 16. 19:53 Posted by 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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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출판 민음사

발매2002.01.31.

 

인생의 부질없는 면면들을 들춰내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인생 속에의 부질없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밥벌이 수단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전공했던 지질학에 대한 대학 시절의 그 넘치던 열정은 모두다 부질없는 것이리라. 인적은 커녕 길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강원도 험한 산 속을 떠돌면서 남들 눈에는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 샘플들을 소중히 모아가며 고생했던 그 시절을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이 헛수고라 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 같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과 그와 함께 떠내려가는 내 삶을 돌아보면 학생운동 시절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그 열정이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는다. 어쩌면 40 중반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 돌아보는 인생에는 참으로 부질있는 일들보다 부질없는 일들의 자리가 더 많은 듯 하다.

그런 일종의 회한과 반성 같은 것들로부터 나름 인생의 교훈이라고 습득한 것일까? 자연스레 어느덧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40 중반에도 아직도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열정의 기력이 쇠하지 않은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중학생인 딸에게는 모든 삶의 요소들이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으로 가는 것과 잘 정렬이 되어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것들은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잔소리 꾼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는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에 사활을 걸려고 하는 부하 직원들의 부질없음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게 된다. 나는 이제 깨달았다는 교만함일테다. 주위 사람들 속의 삶에서 발견하는 그 부질없음들을...

소설 속 고마코의 부질없는 일들에 대해 헛수고라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시마무라의 생각에 동화되면서도, 책임을 져야할 처자식을 버려두고 고마코를 만나러 온천장 마을로 매년 발걸음을 하는 부질없는 시마무라도 판단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고마코에게 차마 헛수고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시마무라를 보면서 일종의 공감을 느끼게 되어 그냥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냥 그렇게 있는 설국의 눈과 은하수와 아름다운 산들처럼, 우리의 부질없는 일들도 그렇게 있을 수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 부질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외딴 산골의 한낱 게이샤인 고마코가 그리고 요코가 시마무라에게 남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도 모두 그 부질없는 것들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렇게 좀더 넓은 마음으로 내 인생의 부질없던 일들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으로 내 주변 사람들의 부질없음을 품어주면 그들의 아름다움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

한편이 서정시와 같은 이 소설은 일상들의 면면을 그려낸 영화와 같은 소설 천변풍경과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이 없다.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리는 온천장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와 동네 처녀 유코, 그녀들을 찾는 시마무라가 그냥 등장한다. 시마무라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그곳의 자연과 고마코, 유코의 아름다움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와 유코의 헛수고들과 어울려 그려지고 느껴진다. 게이샤에게는 필요 없는 고마코의 문학에 대한 동경과 글쓰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유코의 헌신, 가정이 있는 시마무라의 그녀들에 대한 감정, 그 모두가 헛수고일 것이다. 그 헛수고들이 그곳의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냥 담담히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냥 존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생의 중요한 본업과 관련이 없는 그 부질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는 넓은 아량을 소설의 말미에 독자에게 선사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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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저자 채만식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4.01.22.

 

책을 읽는 동안에 주인공을 둘러싼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너무나도 훌륭한 묘사는 익숙하지 않은 구어체의 글로부터 오는 거리감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에 동화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친일작가의 글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나만의 선입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과 부정의한 환경 속에서 파괴되어가는 주인공의 삶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한껏 비통한 마음 속에 돌려 일제 강점기의 고단했었을 선조들의 삶이 보이는 것 같아 그 안타까움이 더해간다.

주인공도 한탄했듯이, 죄없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인생의 억울함들은 그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세상의 죄가 스며들어 인간들 사이의 흙탕물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그 탁류를 모름지기 받아들여야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의 형이상항적인 섭리에 따르면 다 덧없는 일이라며 나름 초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인가?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질문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몰락한 인텔리 정주사의 첫째딸은 초봉은 축복이어야 하지만 저주가 되어버리는 미모를 가졌다. 그 저주는 타락해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쾌락을 찾던 태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태수와 정주사 부부의 불순한 결혼에 대한 동기는 가족을 위한 희생의 대의 명분으로 바뀌어 결혼에 대한 마땅한 초봉의 고민을 잠재워 초봉의 인생의 첫번째 흙탕물을 일으킨다. 태수의 불순한 이기심 곁에는 더욱 노골적이며 천박한 형보의 불손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형보는 태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초봉을 겁탈한다. 태수의 죽음과 형보의 욕망을 겪으며 당황, 분노 그리고 절망에 이르던 초봉은 가족의 지독한 빈곤 앞에 서울로 떠날 결심을 한다. 하지만, 서울 가던 중 아버지 친구인 제호를 만나게 되고, 친구의 딸임에도 자신의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 몰양심의 제호를 세세한 고민없이 따라가서 막다른 골목에서 이번에는 포기하다시피 제호의 첩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송희라는 아이를 낳았으나 세명 중 아버지를 특정치 못하는 상황에 초봉은 당황해하지만, 손안의 자식은 초봉의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어간다. 결국 송희는 제호가 초봉을 버리게 되는 경로의 시작점이 되며, 절대 혐오의 대표인 형보가 초봉을 인생째 겁탈하게되는 매개체가 된다. 인생의 우상을 볼모로 잡혀버린 초봉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쇠락해가는 인생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결국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자살 이후의 걱정거리들을 없애기 위해 형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대로 되지 않고 우발적으로 형보 살해의 목적을 달성했을때, 첫사랑 승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재의 등장으로 초봉은 자신의 삶의 처참한 회환을 느끼면서 동시에 희미한 희망도 보게 된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서곡이다.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서곡이라했을까? 이제 탁류가 그치고 초봉의 인생의 강물이 맑게 되는 서곡이지! 라고 착하고 낙천적인 생각으로만 받을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어쩌면 인생의 탁류의 시작의 서곡이지! 라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취할까? 아니면, 한차례 세찬 탁류를 경험한 헝클어진 초봉의 인생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승재나 계봉의 탁류의 시작의 서곡이지! 라고 해설적이며 관조적으로 받아야할까?

인생의 나름의 원칙을 세우면서 살아가는 승재와 계봉, 그리고 쓸려가는데로 자신의 원칙보다 현실에 타렵하는 초봉을 대비해보면서 삶속에 분명한 나의 입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러기 위해 나의 현재의 한 순간 순간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으면 우리의 인생 역시 험한 탁류에 휩쓸린 초봉의 인생이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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