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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

출판 김영사

발매 2015.11.24.


이 블로그는 Sapiens를 읽으면서 작성한 개인적인 독서노트입니다. 원서를 읽어서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책의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생각과 해석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 An Animal of No Significance

이장의 첫 시작은 빅뱅부터 시작해서 물리, 화학계의 탄생, 인류의 탄생을 간단히 설명하고, 인류사의 세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인지, 역사, 과학 혁명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선사 시대 인간들은 지금처럼 우월하지 않은 그냥 평범한 동물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Homo Sapiens의 대한 정의를 하면서 Homo genus의 Sapiens species 라고 설명합니다.

 

Skeletons in the Closest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Homo genus에 속하는 Sapiens의 형제들에 가까운 인류들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2.5 백만년전 동아시아의 오스탈랄로피테쿠스가 처음 등장하여 2백만년전에는 북아프리카와 유라시아로 흩어져 각가 다른 방향으로 진화를 합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는 사피엔스보다 덩치가 크고 근육질인 네안데르탈인들이 등장하고, 동아시아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합니다. 이들 외에도 Homo solensis, denisova와 같이 외딴 섬이나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인류들도 있습니다. 한편, 동아프리카에서는 Homo rudolfnesis, eargaster와 sapiens도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Ergaster가 진화하여 Erectus가 되고 네안데르탈인을 거쳐 사피엔스가 되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2백만년 전부터 반년전 까지 최소 6종 이상의 인류들이 함께 공존 했을 것입니다.

 

The Cost of Thinking

인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뇌와 직립보행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진화적으로 그다지 유용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거대한 뇌를 가지도록 진화했으며, 그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손이 자유로와지고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습니다. 손이 자유로와지면서 도구도 사용하게 되었는데, 최초의 도구는 골수를 뽑을 수 있도록 뼈를 쪼개는 도구였습니다. 이것으로 비추어보아 인류는 여전히 최상위 포식자가 아닌 먹이 사슬의 중간쯤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Sapiens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너무 급격한 변화라 생태계가 적응할 틈이 없었고, 인간들도 역시 이에 적응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로인해 인간들은 막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민감해서 더욱더 잔인하고 위험한 종이 되었습니다.

 

A Race of Cooks

불의 사용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Sapiens 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틀인이나 에렉투스도 불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불을 사용함으로 인해 음식을 익혀먹으면서 먹을 수 없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세균이나 기생충도 없앨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익힌 음식은 소화에 유리하여 이빨도 작아지고 장의 길이도 짧아지게 됩니다. 장의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기관으로 역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거대한 뇌와 긴 장을 함께 가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국 불을 통해 요리가 장에서 소화를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를 줄여 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불의 사용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크게 구별되게 해줍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연 환경에 지배를 받지만, 인간은 불을 이용하여 자연 환경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Our Brother’s Keepers

15만년 전 사피엔스가 동아시아에 등장했을 때만하더라도 그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7만년 전 쯤 사피엔스는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유리시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이미 네안데르탈 인이 있었고, 동아사아에는 에렉투스가 있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과 에렉투스는 사피엔스의 등장과 더불어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설명할 두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Interbreednig Theory는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합쳐져서 현재 유럽가 서아시아의 사피엔스가 되었고, 사피엔스와 에렉투스가 합쳐져서 중국이나 한국의 사피엔스가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이는 자칫 인종 우월주의의 배경이 되는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편, Replacement Theory는 네안데르탈인이나 에렉투스가 사피엔스와 유전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어 함께 합쳐질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설명이 되고, 정치적으로 합당한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론의 논란은 2010년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의 알려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현재 유라시아에 사는 고유한 인간의 DNA에는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1~4퍼센트 정도 섞여 있다고 합니다. 몇달 후 현재 말레이지아에 사는 인간의 DNA에는 6%에 달하는 Homo Denisovan의 DNA가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 비율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네안데르탈인이나 Homo Denisovan과 Sapiens가 합쳐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어느 시점에 이들의 유전적 차이가 현격하지 않아 번식이 가능한 자식을 낳을 수 있었, 몇몇 네안데르탈인들이 Sapiens의 유전풀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합쳐진 것이 아니라면 네안데르탈인들가 Dnisovan은 왜 사라졌을까요? 아마도 Sapiens와 자연 자원 경제에서 밀려 자연도태 되었거나, 경쟁 때문에 Sapiens에게 학살되어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끝부분에 Sapiens 외의 다른 인류들이 살아남아 현재까지 존재했다면 우리들의 문화, 사회, 정치 및 종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라는 재미있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마 우리와 너무 유사하고 또 너무 달랐기 때문에 Sapiens가 이들을 조직적으로 멸종을 시켰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으로 Sapiens의 성공의 비밀은 고유한 언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의견

1장이 내용은 고등학교 역사에 인류의 기원에 해당하는 정도의 내용들로 그다지 읽으면서 어려운 내용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피엔스 종이 다른 인류의 종과는 진화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특정 기간 함께 지낸 시간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해볼만하고요. 네안데르탈인이 알려진 것보다 잘 진화가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커다른 뇌를 가지게 된 것이 지금에야 유리했지만, 선사시대에는 오히려 불리했을 것 같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정작 아직도 뇌가 커지는 쪽으로 진화를 한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특정 시점에 피지컬의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환경을 관찰하고 이용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시점이 있어서, 뇌를 활용하는 개체들의 생존 확률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로 인해 뇌가 커지는 경향이 발생하고요.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지만, 환경을 활용하는 먹이감의 사냥에는 약한 포식자가 있었던 것일까요?

직립보행으로 인해 골반이 좁아져 미성숙한 개체를 낳은 것이 오히려 사회적인 동물이 되는데 기인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되네요. 미성숙한 개체는 변할 수 있는 정도의 폭이 클 수 있어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의 사용으로 자연 환경을 어느정도 지배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소화 시간도 짧아지고, 장의 길이도 짧아져서 뇌가 커지는 쪽으로 진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Interbreeding 이론이나 Replacemet 이론에 대한 부분들은 재미가 있네요. DNA 검사 결과에 대한 해석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네요. 정의상 종의 구분이 교배가 가능하다는 점인데, 어느 시점에 교배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입니다. 그 보다는 네안데르탈인이나 유럽의 사피엔스들이 비슷한 환경에 있다보니 특정 형질을 발현하는 DNA들이 공통적으로 살아남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굳이 서로 교배를 하지 않아도 DNA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다른 인류들이 생존했을때, 우리들의 문화, 사회, 정치, 종교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고 묻는 질문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감이 오기도 하고요.

하여간 1장은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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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균쇠 - 왜? 라는 질문을 던지자!

서평 2021. 1. 17. 21:17 Posted by 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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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 Germs, and Steel

저자: Diamond, Jared

출판: W.W.Norton&Company

발매: 2017.03.07.

 

이제는 은퇴하셔서 명예교수가 되신 지도 교수님은 고생물학개론 첫 강의에서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늘 강의 내용에서 나는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그 누구도 오늘의 이야기들을 검증을 할 수 없을테니깐..." 비록 주입식 교육에 찌든 우리들이었지만, 교수님의 그 말씀이 지구의 생성에 대한 강의 내용을 일방적 받아들이라는 강요가 아니었다는 것 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권위가 주는 부담을 덜어주신 교수님 덕에 학부 2년차의 학문적 유년기의 우리들은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대한 강의 내용들에 마음껏 "왜?"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왜?"라는 질문은 우리들을 좀더 적극적이고 깊은 사고의 과정으로 몰아넣어 공부하던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우리의 사고 체계에 견고하게 착상시켜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 기억은 강하게 여운을 남긴다.

 

생각과 지식을 정리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이고 조리있게 하는 편은 아니어서 토론에 능하지 않지만, 나는 주변사람들과 사상과 지식의 교제를 나누기위해 토론을 즐긴다. 특정 주제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토론을 하다보면, 평소에 내가 당연시 했던 고정 관념들의 이면을 들추어보게 되는 된다. 다른 의견을 바탕으로 나의 전반적인 삶을 떠받치는 생각들을 재검토하고 다듬는 것만큼 토론이 주는 유익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론을 하다가 맞이하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들도 적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접한 주장이나 사상들을 심사숙고하여 평가하는 과정없이 받아들이, 사상누각을 만들듯이 그 위에 자신들 사고의 결과물들을 쌓아올린다는 점이다. 그런 현상들은 결국은 여러 편견들의 시발점이 되어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다양한 정보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한번 더 그 이면을 생각해보는 것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우리의 사고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중요한 덕목라고 여겨진다. 단지 편견의 틀에 갇히지 않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남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우리의 생각의 나래를 드리워 종국에는 새로운 시각과 사고를 제공할 수 있는 창의성의 발단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토론 중에도 상대방의 주장에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대부분의 답변은 어떤 책이나 신문의 사설에서 읽었다이거나 최근 발단된 SNS나 YouTube 방송을 통해 알게되었다면 나는 다시 한번 그런 미디어의 정보들의 권위가 타당한지 검증해보자고 한다. 그런 시도가 거부되면 물론 토론은 거기서 거의 마무리가 되고, 그럴때마다 나는 새로운 창의적인 생각들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다는 진한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그런 면에서 수많은 비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총균쇠가 참으로 용감히 우리에게 역사의 새로운 영역의 초석을 마련한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현재의 국제 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류 문화사 중심의 역사관에서는 몇가지 권위적인 사고들이 근간이 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세계의 현대화를 이끌어낸 서구 백인들의 상대적인 우월함에 대한 가정일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우월한 백인들은 훌륭한 문화를 만들어 합리적인 사회체제를 확립하여 과학적인 발명에 약진하여 종국에는 상대적인 약자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나 아시아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현대사의 단편들만보면 어쩌면 당연할 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뉴기니 친구 얄리 덕에 당연한 역사학의 명제에 또 한번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왜 서구 백인들은 보다 나은 문화와 사회체계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약진할 수 있었을까?"라는 이 새로운 질문은 저자의 창의성을 자극하게 된다. 그런 저자의 창의성은 그가 익숙한 과학적인 방법을 바탕으로 한 논증으로 집약되어 이 총균쇠라른 서적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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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우리시대의 논리 27)

저자 조정진

출판 후마니타스

발매 2020.03.30.

 

이 책은 38년간 공기업에서 근무했던 저자가 퇴직한 이후, 생계를 위해 여러 임시 계약직 일자리에서 겪은 일들을 수기 형식으로 기록한 일종의 르포타쥬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정년 퇴직을 한 이후 안락한 노후를 기대하던 저자는 예상치 못한 아들의 뒤늦은 대학원 진학을 지원하기 위해 다시 직업 전선으로 뛰어든다. 나이든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는 열악한 근무 환경과 기본적인 노동권도 보장되지 않는 시급제 임시 계약직 밖에 없다. 첫번째 버스회사 배차요원, 두번째 아바트 경비원, 세번째 빌딩 경비원과 아파트 경비원의 겸업, 그리고 네번째 고속버스 터미널 경비원으로 겪게되는 일들과 저자의 생각들을 책은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르포타쥬 형식의 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르포타쥬 형식의 글을 읽다보면 깊은 사고없이 책에서 주어지는 내용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거라면 차라리 티브나 유튜브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편, 저자의 자기 중심적인 시각과 이해하기 힘들 결정 등을  보는 것도 불편했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한 아들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취업을 결정한 것 저자의 결정도 공감하기 힘들었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최소한의 생계의 수단으로 표현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튼 책 속에 등장하는 저자 주변의 갑질을 일삼는 무례한 사람들과 저자의 공감하기 힘든 행동들로 인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기대했을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답답한 마음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여러가지 부정적인 면면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 속에 묻어나는 세상의 불합리를 외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은 부의 총합과 공리의 극대화를 가능케한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생산자들은 경쟁의 과정을 통해 생산성을 확대하여 소비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재를 공급해주며, 노동자들 역시 경쟁을 통해 건전한 노동시장을 제공하여 생산자들의 안정적인 기업활동이 가능하게 해준다. 바로 이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이 현재 인류 사회가 누리고 있는 번영의 일등 공신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쟁은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임시 계약직 노인장들을 양산해내는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늘어만가는 고령 노동자들은 한정된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을 심화시켜 고용관계에서 불리한 상황을 악화시킬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저자의 취업은 다른 노동자의 손쉬운 해고와 연결이 되어있었고, 저자의 해고도 결국 손쉬운 대체인력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그 경쟁의 냉혹함에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건전한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에 따른 차등적인 대우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쟁의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한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충분한 노력과 준비를 하지 않아 자업자득으로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이나 사회적 혜택에서의 소외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불운함으로 인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노력과 준비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문제나 상황적인 문제로 인해 한 개인이 고통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는 분명 도덕적 담론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의 기간이 길어지거나 정도가 과도하다면 이 또한 도덕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커다란 성공이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기술발전과 자원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결국 생존을 위한 생산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게 될 것이고, 생산에 종사하는 시간의 감소는 인류의 여유시간을 늘려, 자본주의 핵심 요소인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에 대한 도덕적 담론을 활성화시켜준다. 인류는 자본주의보다 도덕적 우위인 사회주의나 다른 경제 시스템을 채택하여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슘페터의 이야기처럼 도덕적으로 우월한 시스템이 언젠가는 오겠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과정의 긴 시간 동안에 나타날 인간들의 고통의 총합은 너무나 과도해보인다. 평등의 정신에 입각하여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도덕적인 담론으로 그들의 고통을 쓰다듬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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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yranny of Merit :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저자 마이클 샌델

출판 PenguinBooksLtd

발매 2020.09.03.

공정하다는 착각

저자 마이클 샌델

출판 와이즈베리

발매 2020. 12. 01.

 

 

이 블로그는 The Tyranny of Merit를 읽으면서 작성한 개인적인 독서노트입니다. 원서를 읽어서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책의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생각과 해석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들어가며

2020년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여 수많은 환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와중에 한계를 드러내며 적절한 대처를 못했다. 전부터 전문가들의 바이러스 유행에 대한 경고가 있었고, 1월 중국에서 먼저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초기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환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동안에는 의료진들에게 필요한 의료 마스크나 보호장비, 확진자 검사를 위한 진단 키트, 위급환자들을 위한 인공호흡기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물자조차 조달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냈다.

이런 미국의 무기력과 취약함을 초래한 다양한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러스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미국 국민들이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수십년간 진행된 기업들의 해외 아웃소싱은 필수 의료장비 조달의 해외 의존도를 높여, 중요한 시점에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겉으로 드러난 문제점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국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분열이었다. 수십년간 진행된 불평등의 심화와 이에 따른 문화적 적대감은 트럼프라는 대통령을 탄생시켰으며, 위기의 순간에 미국 사회는 무능력과 취약함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한편, 바이러스의 유행은 상호협력과 거리두기라는 역설을 만들어냈다. 사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해야하는 존재이지만, 바이러스의 유행은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역설은 정치, 문화, 사회적 분열과 더불어 바이러스 문제 극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대한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현재 미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더이상 좌우의 이념대립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있다. 미국의 시스템에서 성공은 적절한 교육과 경쟁에 대한 준비 그리고 글로벌 경쟁에서의 승리에 달려있다. 이 경쟁구도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분리하여 승리자들이 누리는 성공과, 패배자들에게는 닥치는 실패를 당연시한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다"라는 믿음은 존재하기 힘들게 되었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미국의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게 된다.

미국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학이나 과학기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상황에 빠진 도덕적 정치적 쇄신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상호 신뢰와 존중의 문화가 어떻게 퇴색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책의 목표는 그런 과정을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서론: 대학입시와 능력주의

2019년 3월에 입시 상담가와 대학 관계자가 개입한 부정입학 사건 사건은 미국 사회를 떠들석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 대학 입시의 공정성과 더불어 누가 왜 보다 나은 능력을 가지게 되느냐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첨예한 마찰을 불러와 보수진영에서는 부정입학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대다수 진보진영 사람들임을 꼬집어 진보진영의 이중성을 비난하였다. 진보진영은 트럼프의 아들과 딸들이 막대한 기부금을 통해 대학에 기부 입학한 것을 바탕으로 대학입시에 관련된 경제력에 따른 뿌리 깊은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입시 윤리

물론 둘다 돈이 든다는 사실은 같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기부입학과 부정입학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부유층 자녀들이 대학 입시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 이 두 방법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사실 대부분 공정하다고 판단하는 일반 전형의 경우에도 그 이면을 잘 살펴보면, 과연 경제적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면에서 부정입학 사건은 능력주의 이상을 기반으로 하는 고등교육 시스템을 위협하는 광범위하게 만연된 사회의 불공정을 표면화시킨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능력위주의 입시에 대해서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대학 입시에서 그들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지 그들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평가를 받아서는 않된다. 능력주의에 대한 이견이 없다면, 문제의 근원은 실제 사회가 능력주의의 이상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능력주의 이상 실현을 위한 공정한 방법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진보주의자들은 인종별 쿼터를 입시제도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이 역시 또 다른 역차별을 만들어낸다면서 반대를 한다.

또한, 부정입학 사건의 이면에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류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수십년간 불공정이 심되면서 대학 졸업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소득의 격차가 커지면서, 대학 진학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 되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중산층의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면서까지 자식들의 일류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불공정한 사회에서 낙오하면 상대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불러일으키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이런 두려움이 심화되어,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자식들을 일류대학에 진학시키고자하는 부모들이 나타는 것일 것이다.

능력 구매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높은 계층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싶어한다.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성취한 결과로 그들이 성공했다고 믿는다. 입시 부정은 기부 입학 방식과 달리 들키지만 않으면 일반 전형과 같이 자녀들에게 위에서 말한 정당성과 믿음을 선물해줄 수 있다. 한편, 진정으로 개인의 능력과 재능으로만 선발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의 능력과 재능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능력주의에 대한 고민해봐야할 또 다른 단면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공이 순전히 자신들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만 여기게 되면 사회의 공공선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개개인의 겸손과 관용을 배우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부정입학 이면에 깔려있는 진정한 문제는 바로 공정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공정의 문제만이 이성적 능력주의의 구현 방식에 대한 찬반의 요인이라고 볼 수 없다. 성공과 실패, 승자와 패자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성공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하는가? 와 같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런 모든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오늘날 이 책은 능력주의에 대해서 고찰해보려고 한다. 엘리트 계층에 대한 적대감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현재의 날선 정치를 통해 능력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공공선을 위해 어떤 다른 방안이 필요한지 고찰해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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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저자 유시민

출판 푸른나무

발매 2004.01.19.

 

이 블로그는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읽으면서 작성한 개인적인 독서노트입니다. 책의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생각과 해석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칼 마르크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Karl_Marx )

 

 

공산주의 사회의 높은 단계에서는 개인의 노동 분업에 대한 노예적 종속,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노동은 단순한 생활수단만이 아니라 삶의 최우선적 요구가 될 것이다. 또한 생산력은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증대될 것이고, 모든 협동적 부의 원천들이 풍요로이 넘쳐흐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르주아 법칙의 협소한 지평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는 그 깃발 위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문구를 아로새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중에서

 

낡은 유럽을 뒤흔든 혁명의 해

1849년 마르크스는 1848년부터 유럽 전역을 뒤흔든 반란과 폭동의 주동자라는 혐의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아성인 영국은 그에게 정치적 자유와 함께 대영박물관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그 덕분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시한부적인 종말을 고한 자본론이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

 

1848년 엥겔스와 함께 공동 저작한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지 마자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프랑스 2월 혁명은 원래 지주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의회 권력 투쟁 와중에 법개정 공청회에 노동자들이 난입하여 왕정이 붕괴되고, 브루주아 정치인들이 공화국을 세우는 혁명으로 이어진다.

 

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임시정부에 노동권 승인을 요구하며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요구하게 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지배계급은 무산 계급에 대한 대살육전을 펼치며 이들을 진압한다. 임시 정부의 군대와 노동자 반란군 간에 파리 시가전이 사흘간 벌어지면서 8백여명의 노동자가 전사, 1만 여명의 노동자 전후 학살, 2만 5천명이 넘는 유배자를 만들어내며 반란은 진압된다. 샤를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지만, 친위 쿠테타를 통해 황제로 등극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칼 마르크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빈민의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사회주의의 장미빛 미래에 대한 환상이 가난과 불행을 고통받는 노동자들에게 전파되었다. 1848년 노동자들의 혁명은 사실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았다고 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유럽의 혁명적 사태들이 새로운 사회로 변화해가는 가운데 필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당 선언문은 정치선언문으로 지대한 성공을 거둔다. 유려한 문장은 여러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개종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스미스의 신세계는 자연적 자유의 질서가 아닌 인간사회 발전과정의 특수 질서임을 명백하게 한 것이다. 결국 윤리도덕이나 주관적 희망이 아닌 일련의 발전 법칙을 통해 필연적으로 한층 더 평등하고 풍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유토피아의 동력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 내에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목적을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는데 두었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를 추종하는 무리와 반대하는 무리는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 사상은 다른 많은 위대한 사상과도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 않지만, 터무니없는 오류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19세기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지 역사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닌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마르크스의 여러 저서들을 통해 정립된 유물론적 세계관과 역사철학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우리의 20세기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세기 노동자들의 참담한 삶을 보면서 부와 빈곤을 동시에 생산해낸 자본주의를 혐오했으며,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자본주의의 파멸과 공산주의의 도래를 사회적 필연성으로 설명한다.

 

위대한 부르주아지,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

마르크스의 경제 모델은 스미스와 리카도의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자유방임시장의 원리에 동의하고 그 업적도 승인했다. 다만, 자유방임 시장에서 공존해야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는 대립과 투쟁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일방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그렇기에 낡은 소유관계와 사회로 돌아가려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마르크스는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임금철칙이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로 인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기계 도입으로 발생하는 실업자들로 인해 기존 노동자의 임금은 최저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마르크스 역시 자유방임 시장에서의 등가 가치의 상품 교환이 이루어지며, 상품의 교환가치는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양이라고 정의했다. 이 두가지 전제 위에 마르크스는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분배이론으로 잉여노동으로 생산된 이윤이 부르주아지에 독점되는 잉여가치설을 제시한다.

 

자유거래라는 또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자본가들의 신성한 소명은 이윤 혹은 잉여가치의 확대이다. 잉여가치의 확대는 잉여노동시간을 증대시키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확대와 노동자의 필요노동 시간을 줄이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확대가 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자본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확대가 필요한 사회적 메커니즘의 한 결과인 가련한 존재이다.

 

스미스는 분업화와 특수화에 따른 생산력 증대로 고달픈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는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공산당 선언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한 것으로 바꾸었다고 비난한다.

 

마르크스 사상이 증오의 과학이라는 비난도 있다. 하지만, 증오를 제거해도 성립하는 그 사상의 과학적 측면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가 마르크스의 고달픈 생애

유태인 아버지 하인리히는 변호사 생활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 유태인 출신이기는 해도 마르크스는 유태인의 성향을 찾아보기 힘들다. 라틴 고전 해독과 수학에 재능을 보이다가 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베를린 대학 법학부로 옮기게 된다. 나중에 장인이 되는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으로부터 귀족적 특권의식이나 오만이 없는 자유주의적인 면모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사유재산의 폐지없이는 인간 사회의 발전과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생시몽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베를린 대학에서 공산주의 사상가의 역정이 시작된다. 마르크스는 철학상의 대논쟁에 휩쓸려 헤결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헤겔은 세계의 본질은 변화이며, 모든 역사적 발전은 사물 자체에 내포된 자기모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사상은 인간 관념의 변화 발전이 사회 변화를 일으킨다는 관념론적인 변증법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 사상 위에 무신론과 공산주의 등 현실 문제를 연구하는 그룹에 참여하여 철학적 급진주의자가 되어간다. 헤겔 철학을 열심히 연구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1841년 쾰른에서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곧 두각을 나타내고,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파리로 망명한다. 프로이센 정부의 항의를 받은 프랑스는 추방명령을 내리고 벨기에 브르쉘로 떠난다. 하지만,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만나고 다른 혁명가와 사상가들을 만나는 등 의미있는 시간을 가진다. 헤겔학파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근대 철학사를 분석한 신성가족도 파리에서 집필한다.

 

브뤼셀 에서는 엥겔스와 본격적인 연구와 집필 작업에 들어간다. 사적 유물론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독일 이데올로기, 사회발전에서 실천이 지니는 중요성을 해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집팔한다. 프로동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의 최초의 경제학 저서인 철학의 빈곤도 집필한다.

 

1847년 경제공황으로 노동자의 파업과 폭동은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고, 마르크스는 이 동맹의 사상적 지도자가 되어 공산당 선언을 집필한다. 1848년도 혁명이 시작되고 1949년까지 독일은 혁명적 사태에 놓인다. 독일로 돌아가 신라인 신문을 창간하여 활동하지만, 혁명이 진압된 이후에 런던으로 1849년 다시 망명을 떠난다.

 

1856년 고향에서 온 유산으로 인해 빈민굴에서 고생하다 세 아이를 잃는다. 미국 부르주아지와 공화당 대변지인 뉴욕 튜리뷴의 통신원으로 수입을 감당하여 나름 만족할만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연구와 혁명활동에 전념하여 자본론을 집필하고 국제공산주의자 단체인 제1인터내셔널 서기장으로 선출된다.

 

자본은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

마르크스의 세계는 순수한 경쟁적 자본주의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이 체제는 대립과 투쟁을 통해 다른 체제로 발전할 운명에 처한다.

 

리카도는 자본이 축적될수록 이윤율이 하락한다고 했지만, 마르크스는 기계를 도입함으로 임금 상승을 대처하고 경쟁으로 잉여가치가 줄어들어 맬서스가 이야기한 과잉생산 공황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 더 강한 자본은 쓰러진 기업을 인수하여 독점의 길로 나아간다. 결국 소수의 손에 모든 생산 수단이 독점되는 체제가 된다.

 

자본의 독점이 진행되면서 노동자에 대한 압제, 노예화, 착취가 진행된다. 노동자들의 삶은 불안정해주고,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싸움은 폭동이 된다. 결국 부르지아지의 몰락과 플롤레타리아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이다.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다르지만, 마르크스에게는 역사란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사회적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삶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서부터 비롯된 증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마르크스의 과학이 중대한 결함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공격의 근거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가치는 추상적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격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수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가격이 가치를 반영하는 것을 증명하려했다. 비록 사소한 실수는 있지만 약간의 수정만 곁들이면 유효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이 해결하지 못한 업적이다.

 

또 하나의 공격은 규범적인 경제학이라는 점이다. 경제학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분석하는 것에 자기의 역할을 다해야한다는 주장인데, 사실 이 주장 역시 현존하는 사회질서가 유지되어야한다는 암묵적인 규범을 담고 있다.

 

한편 마르크스의 결정론이 사실이라면 굳이 혁명을 해야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뭐 결정이 되어있기는 해도 하루 빨리 그 결정을 앞당기는 노력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잘못 추론된 결정론을 입증하기 위해 무리한 혁명으로 사회의 에너지를 허비했다는 비판은 일면 타당할 수 있다.

 

밀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의 불공정함을 발견하는데 마르크스의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와 크게 차이가 없다. 이런 잘못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으로 인해 마르크스는 도덕적으로 자본주의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론적 국가관으로 인해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고 수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초의 노동자혁명, 파리 코뮌

마르크스는 생전에 사회주의 혁명을 보지 못하였다. 1871년에 수립된 최초의 플롤레타리아 정권인 파리 코뮌은 72일만에 붕괴된다. 파리 코뮌의 발단은 프로이센이 통일독일을 수립해가는 과정에 발발한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 떼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두 국가 간의 전쟁동안 두 나라의 프롤렐타리아는 국적을 초월하여 단결하지 않고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에서는 내전이 발발하여 혁명으로 이어진다. 1871년 3월 18일에 시작된 내전에서는 하루만에 국민군의 승리로 이어져 3월 26일 코뮌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최초의 노동자 권력인 코뮌 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독일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부르주아지는 파리에 대한 총공격을 가해 혁명을 분쇄한다.

 

마르크스는 지독한 공부와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인해 다양한 병에 시달렸다. 아내 옌니가 먼저 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큰딸마저 죽고 마르크스는 폐렴으로 사망한다.

 

마르크스가 남긴 수많은 원고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 엥겔스는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자본론 2권과 3권을 출간한다. 엥겔스는 부르주아의 외모와 생활 습관을 가졌던 사람으로 마르크스를 만나기 전에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라는 책을 통해 사회주의 정치 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처음 언급하기도 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그늘에 많이 가려졌기는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이 지금과 같은 활기와 넓이를 가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혁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효과적인 개량

마르크스의 과학적 예언은 그대로 실현이 되지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서유럽이 아닌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쿠바, 베트남과 같은 후진 농업국과 제3세계 국가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런 사회주의 국가들은 20세기 말에 붕괴되어 멸망의 운명을 가진 자본주의로부터 원조를 받는 신세를 거쳐 자본주의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로 인해 마르크스의 사상과 경제학을 모두 부정할 수 는 없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멸망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후에 무엇이 도래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그의 유토피아적 소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한 경제학자로소의 분석과 결론 때문이다. 그의 순수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독점자본을 출현실킬 것이라는 예언은 그대로 적중이 된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신기술의 부단한 도입, 그리고 주기적인 공황도 적중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만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그 이유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부르주아지의 개량 때문이다. 서유럽의 혁명적 정세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래를 바라보면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수정을 가하기 시작한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스미스와 리카도 그리고 마르크스가 이야기하 순수 경쟁자본주의와는 많이 다르다.

 

공산당 선언에서 대중의 호감과 지지를 위해 내건 요구한 사항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토지사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목적에 사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세를 실시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신용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킨다

6. 통신과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킨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시킨다.

8. 누구나 동등한 노동의 의무를 지닌다. 특히 농업을 위해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함시킨다. 인구를 전국적으로 좀 더 균등하게 배분함으로써 도시와 농촌 사이에 처벌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는 모든 어린이를 위해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과 생산을 결합한다.

 

혁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대중의 가슴 속에서 반란의 싹을 제거하는 효과적인 개량이다. 수정자본주의는 부르지아지의 각성과 시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얻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는 공산당 선언에서 나온 요구사항들이 상당부분 반영이 되어있다.

 

마르크스 사상은 19세기 유럽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절대 빈곤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이론을 무작정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가 추구한 가치이다. 경제적 평등에 뒷받침되는 진정한 자유, 소외되지 않는 노동과 정당한 근로에 의한 소득,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관습과 이데올로기 로부터의 해방, 개인의 자유롭고 전면적인 발전과 같은 가치들은 인류문명이 지향해야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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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서평 2020. 11. 16. 19:07 Posted by 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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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GUE

저자알베르 카뮈

출판VINTAGE

발매199105

 

코로나, 인종차별문제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관통하는 미국 사회는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에게 이질감을 심화시켜준다.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일부 국민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과연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인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문제의 해결과정을 바라보자면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인인 나와 내 가족들이 미국사회 속에서 과연 공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희대의 대통령이 써내려가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역사는 그가 그전에 보여준 행동들이 백신처럼 작용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한인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냉철한 상황 판단 없이 대선 조작의 음모론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 반응할 기력마저 쇠하여져 나의 의식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 무기력의 본질은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그 원인임일 것이다. 그 난해함은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한 단계 더 높은 고전의 단계로 상승해가고 있는 카뮈의 페스트는 어린 시절 힘들게 읽었으면서 느꼈던 어렴풋한 기억들과 연결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독서 토론 모임에서 페스트를 같이 읽기를 제안했고, 몇몇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페스트를 읽고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대해 토론을 즐기며, 카뮈가 경험했을 부조리한 세상과 그가 걸어갔던 길을 반추해보았다. 페스트를 통한 카뮈의 주장이 너무나 명확한 것인지, 토론을 함께한 우리들이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탓인지 토론은 어쩌면 자명한 결과로 타루나 리외, 그랑, 카스텔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히하며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성실히 행하여야 한다는 훈훈한 결론에 손쉽게 도달하였다.

그런 토론의 훈훈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교인인 나로서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의식의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페스트 안에서 그려지는 파늘루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성당으로 모여들었으며, 파늘루 신부는 하나님깨서 애굽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인용하여 오랑시의 페스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온전케되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는 기독교 신자인 나의 입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 없으나, 그 어떤 시련들도 결국에는 합력하시는 선을 통해 결국에는 우리가 정금과 같이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린 오탕의 아이의 심히 고통스런 죽음의 과정에서 부여주는 의사 리외의 파늘루 신부님에 대한 항의를 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지성을 갖추고자하는 한 인간의 관점에서 동감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한번 그 섭리에 대한 동의에 대해 도전을 만들어낸다.

코로나와 인종차별, 그리고 미국 대선의 관통하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 역시 같은 교인임에도 받아들이기 곤란한 일들로 가득하다. 초기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공포 속에서 도시가 폐쇄되는 모습을 보며, 선교사들을 억압하는 중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교인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런 주장을 하던 분들이 코로나 창궐의 정점을 달리는 미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하지 않는 모습에는 부당함을 느껴졌다. 더 나아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항의 시위와 관련된 약탈에 대한 문제점으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세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들은 의식의 무기력을 키워낸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공유하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모습에 이르게되면 무기력이 절망감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교회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아래 교회가 사회에 대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고민하고 기도 속에서 그 일들을 해내야한다고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발전하여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이라는 시대 사조를 조롱하는 듯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카뮈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와 인종차별, 그리고 희대의 대통령과 그의 재선에 관련된 일들 속에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전체적으로 깨닫는 것은 아마도 개개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조리 속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자원 봉사대를 꾸리는 타루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와 그랑, 카스텔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또 교회가 해야할 일들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해야하는 또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들은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에서는 페스트 창궐 속에 살아남은 자들에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상봉만이 유의미하게 남고, 타루와 같은 이웃 사랑의 실천의 희생에 대한 교훈의 자취는 덧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관념적인 논쟁에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코로나와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는 이웃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노력이 세상에 덧없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것을 두번째 계명으로 주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소망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 보다는 사회에 대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올바로 서는 것에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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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 콘서트

저자 이재만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2009.04.17.

 

나는 학부로 지질학을 공부했고, 제대로 시작도 못했지만, 석사과정을 공부할 요량으로 고생물학 연구소에서 3년간 공부를 하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신앙 생활 초기부터 몇몇 사람들로부터 성경 대 지질학 혹은 진화론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믿는다면 46억년이란 지구의 나이를 제시하는 지질학이나 진화의 과정을 걸쳐 지금의 생태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진화론은 틀릴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몇몇 분들은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이 제시하는 나름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지질학이나 진화론은 잘못된 학문이며, 홍수 격변론이 더욱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잘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내가 연구하고 있는 지질학은 무신론에 기인한 잘못된 패러다임으로 인해 계속 진리와 괴리되는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학부를 마치고 3년간 고생물을 연구하면서 얻은 짧은 지식만으로도 그들의 과학적인 증거들이 편향된 시각에 의도에 의해 취사선택이 되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성령님의 주관하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족한 나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그분들의 영향으로 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했던 지질학으로 인해 세상의 잘못된 패러다임에 빠져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믿기 힘든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뉴턴의 진리의 바닷가의 돌과 조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참된 학자의 자세는 학문적인 겸손함으로 세상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되뇌여보았지만, 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꺼져가게 되었다. 마침 IMF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경제 상황으로 많은 학생들이 좁은 취업의 과정에서 자신의 전공을 바꾸는 틈에 나도 고생물학을 더 이상 업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그로인해 신앙과 과학의 그 지난한 논쟁이 나의 삶에서 비껴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내가 의도적으로 안락한 신앙 생활을 위해 몰이성과 반지성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지성과 이성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받은 것인데, 그 이성과 지성에서 오는 도전들도 우리가 주님 안에 온전케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그 지성과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하는 나태함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나태함들이 극단적인 근본주의와 독단적인 교조주의가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모습을 방관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대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특별히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진화론의 패러다임에 물들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교회 안에 팽배한 신학적인 오만함, 학문적인 몰이해, 문화, 사회적인 괴리감, 그리고 위선적인 신앙생활들이 우리를 침몰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런 창조과학과 궤를 맞대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그것을 옹호하는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성도들 사이의 대화의 단절을 꿰하고, 심한 경우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상황으로 내몰아간다. 상대적인 비기득권자인 젊은이들이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남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교회에서 창조과학 세미나 행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의 덕이 되기 위해, 그냥 조용히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외면하려던 마음이 습관처럼 올라왔다. 기도 중 과연 그것이 교회의 덕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참여한 세미나의 내용은 역시나 20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리한 논리전개, 오류 투성이의 실험, 왜곡된 문헌 인용 및 해석, 학문적 교만을 바탕으로 거의 기만에 가까운 세미나였다. 그나마 자유로운 질의 응답마저 불가능하여 참다 참다 세미나 중간에 질문을 던졌다. 아마 교회에 두고두고 회자될 듯하다.

그러나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이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던 목회자들마저도 10년이 넘게 함께 생활한 성도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책의 내용은 ... 예전에 정말로 서평쓰려다가 책낼뻔한 경험이 있다. 책의 내용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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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저자 최진석

출판 21세기북스

발매 2018.08.13.

 

읽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다. 토론 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할 책으로 선정이 된 이후에 인터넷에서 책에 대한 후기와 저자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해주었으며, 저자 역시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학교의 설립을 위해 20년간 재직했던 유명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이력으로 인해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는 도중에 그리고 읽고 나서도 실망이 컸던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주요 메시지인 사유 행위로서의 철학라던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위한 필요한 자세들이 규정된 철학적 시선의 정의에 대해서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전반적인 서술 과정 대부분은 논거의 부족과 논리적 비약을 드러내고 있어서 동의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 논거의 부족과 편협한 해석들도 대부분 낡은 식민사관이나 문화사대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시선이 과연 좀더 나은 사고를 하는데 있어 어떤 효용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책은 일반적으로 장이 아닌 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아마도 이 책의 기본 골격은 강의안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체 5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1강에서 4강 까지가 실질적인 책의 내용이고, 마지막 강은 질의에 대한 저자의 답변들이 담겨있다. 1강 부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철학은 살아있는 사유이고 행동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해서, 중국 근대사를 예로 들어 문화, 사상, 철학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강 선도에서는 철학적인 시선을 갖추어 선도와 창의력을 발휘해야 선진국으로 도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3강 독립에서는 베이컨이 이야기하는 우상들에서 벗어나 니체가 이야기하는 독립적 주체로 관찰과 몰입을 통해 세상의 현상들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4강 진인에서는 다시 한번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 덕을 통해 자신을 이겨내어 지성을 완성시켜나가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철학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지말고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이 시대에 철학을 단순히 철학 이론들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다 합리적인 철학적인 사고를 위해, 보편타당한 철학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철학 이론들을 공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적절한 지식 기반 없이 사고의 과정에 뛰어들게 되면 철학을 했다는 나름대로의 정신승리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고 결과의 수준은 자못 뻔하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철학 이론 습득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일 수 있다. 나 역시도 그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가 표현하듯이 그것이 훈고적, 후진적 이며 낮은 시선이라 극단적인 평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합리적인 철학이라는 행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한편 철학이라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주장 자체가 참신한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에서 철학적 사고에 방해가 되는 우상들을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학적인 방법론을 면밀히 따져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행위로서의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저자가 정의하는 철학적 사유의 시선들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시라토리의 “니체의 말"이라는 책을 보면 대부분 니체가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저자가 책에서 베이컨이나 니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난감하다. 저자가 수십년간 유명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셨다고 하던데, 베이컨이나 니체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다.

일단,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자의 주장들에 논거의 결핍, 논리적 비약, 그리고 관념적인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읽다가 보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이 너무 많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토론 모임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없었다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강과 2강에서 언급되는 중국, 일본, 한국의 근현대사 분석 부분이 가장 답답했다. 중국과 일본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을 가져 선진국의 길을 갈 수 있었고, 한국은 낮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으로 인해 식민지를 거쳐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그렇다쳐도, 중국은 언제부터 선진국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은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당시 최신식 철학인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해서 결국은 선진국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한다. 철학에 대한 갈망으로 중국이 마르크스 주의를 채택했었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그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수입한 북한과 베트남은 왜 아직도 선진국이 되지 못했는가? 한편, 중국이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졌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것도 어느 한 도사(도교의 성직자)와의 대화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수준높은 철학적 시선을 입증하는 다른 논거들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가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을 가져보지 못하고 남의 것을 무작정 베끼기만 하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중진국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근대사 부분에서 조선 시대를 낮은 수준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도 역시 수준이 낮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수준의 높낮이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성공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면 수준 높은 철학적 시선인 것이고,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수준이 낮은 것인지 묻고 싶다. 개인적인 근현대사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19세기까지 조선은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국가를 유지했으나 서구 열강의 야만적인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신민지화가 되었다. 그 안에도 실학운동이나 계급운동과 같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계 정세는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이 보다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움직임을 삼키어, 조선은 식민지 종속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나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철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사회 내부에서 채택되거나 논의되어 왔었다. 유래 없을만큼 다양한 사상들의 충돌 자체만으로도 이미 수준 높은 철학적인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나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과 같이 시각을 달리하면서 국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고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경제적, 과학적, 군사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으며, 더불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기에는 이르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솔직히 발전의 원동력은 수준높은 지식 기반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력과 군사력의 성장이지 않을까 싶다. 중국도 마찬가지이고,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한 유렵도 그랬을 것이고, 미국도 동일한 이유로 패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그토록 주장하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발휘해야하는 창의성의 문제에도 이견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창의성의 발현은 창의적인 사람들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반 환경과 그 창의성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창의성의 근간이 되는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치자. 그 사람들이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는 학교, 직장이나 단체가 없다면 질문이 창의성으로 연결이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저자의 주장대로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창의성이 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특정 기업이나 단체들이 사회 시스템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 창의의 결과들을 제대로 수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창의적인 인재들을 아무리 많이 양성해봐야 결국에는 그 창의의 결과물들은 사장되고, 그 인재들의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회, 질좋은 창의의 결과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사회구조가 이루어지면 굳이 창의성을 가진 인재들을 양성하지 않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은 창의성을 획득하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식의 습득과 현실 문제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시선의 방법론들은 관념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설명이 너무 많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고의 전개 과정에서 보편타당성을 검증하는 부분들이 결여되어있어 저자의 방법론을 택한 사람들은 쉽게 베이컨이 이야기한 우상들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너무 심한 확대 해석 혹은 비약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부족한 논거, 편협한 해석, 심각한 단순화들이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관찰, 측정, 실험,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으로 구성된 과학적 방법론이 우리의 인식, 가치체계, 자연현상 등을 탐구하는데 적합하다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철학적인 시선은 “관찰, 측정, 실험”의 중요성을 매몰하고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의 중요성만 강조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 세태가 “관찰, 측정, 실험”에만 몰두하며 “일반화, 시험 및 가설의 변경”에 익숙하지 않아 철학적인 시선이 중요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한가지 명심해야할 것은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고 섣부른 일반화는 현실과 동떨어지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시험과 가설들을 양산하여 불필요한 사회적인 에너지의 낭비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모임에서의 토론 과정이 심화되면서 이 책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어 좀 감정적인 서평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뚜렷한 과점을 가지고 책을 읽기를 권한다. 관념적인 단어들로 가득찬 저자의 서술과 주장들은 현실성을 가리워서 독자를을 쉽게 현혹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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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저자 나쓰메 소세키

출판 이레

발매 2008.05.20.

 

백년이 지난 후에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 소설이다. 그러다보니 이 한편의 소설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주인공에게 당연히 중요한 아버지의 죽음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선생님의 죽음에 매개체는 천황의 죽음에 대한 노기 장군의 순사라는 것과 소세키 생전의 발언들을 중심으로 황국신민화를 꾀하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자살을 감행하는 선생님과 그의 친구 K의 죽음과 마지막까지 아내를 걱정하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비시켜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져야하는 기본적인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가히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어린 시절 부모와 원만한 관계와 사랑을 나누지 못해서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선생님과 K와 아버지에 대한 원만한 사랑의 관계를 소유한 주인공과 대비하여 부모 자식 간이 사랑이 중요함을 설파한다는 해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방향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짚어놓을 수 있을만큼 이 소설의 필치가 대단함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실로 주인공의 독백과 선생님의 유서는 그들의 마음 속 내면 깊은 곳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유려한 서사시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누구나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 의식과 지켜고 싶어하는 개인의 실질적인 삶의 현실에서의 괴리감에 고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괴리감을 느낄 때면,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낙담 비슷한 것을 느끼며 고뇌와 죄책감에 빠져들게 된다. 표리부동하고 부조리하거나 무능력한 세태를 내 의식에 각인되어있는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면서 느끼는 감정에는 과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 것일까? 남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가져다 대는 것처럼 한치의 변명도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나에게도 그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 마태복음 26장에 나온 예수님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이런 우리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습성이라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결한 마음의 눈으로 부족한 우리 삶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까?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선생님은 자신을 기만했던 숙부를 정죄했던 그 고결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이기심으로 친구를 기만한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면서 결국 낙담과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고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마음의 눈이 현실의 삶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직시함이 만들어낸 고뇌들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아버지와 같이 우리들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책임감이 그 고뇌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전반부는 우연히 알게 된 무기력한 현실을 살아가는 고고한 학식의 소유자인 선생님을 마음 속에서 존경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서술로 시작된다. 중반부에서는 주인공은 병환으로 위독해져 죽음에 다다른 아버지를 돌보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신의 마음에 고뇌를 시작한다. 종반부는 소설의 핵심으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선생님의 유서형식으로 씌여진 자서전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자신을 기만한 숙부에 대한 증오로부터 시작된 염세적 사고, 하숙집 아가씨와 사모님과의 인간적인 교제로 인해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 친구 K와 하숙집에서의 동거, 그리고 아가씨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K와의 갈등. 결국 아가씨를 자신이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으로 친구를 기만하는 선생님은 K의 자살로 충격을 받고, 그 후 자신에 대한 변호로만 일관하는 자신의 행동에 낙담하게 된다. 아가씨와의 결혼으로 삶을 바꾸어보려했으나 오히려 아내는 K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게 만들었고, 그는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의 예의를 지키며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된다. 결국 천황의 죽음과 노기 장군 부부의 순사를 핑계로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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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 부질없는 일들에 대한 관대함

서평 2020. 7. 16. 19:53 Posted by 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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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출판 민음사

발매2002.01.31.

 

인생의 부질없는 면면들을 들춰내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인생 속에의 부질없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밥벌이 수단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전공했던 지질학에 대한 대학 시절의 그 넘치던 열정은 모두다 부질없는 것이리라. 인적은 커녕 길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강원도 험한 산 속을 떠돌면서 남들 눈에는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 샘플들을 소중히 모아가며 고생했던 그 시절을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이 헛수고라 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 같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과 그와 함께 떠내려가는 내 삶을 돌아보면 학생운동 시절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그 열정이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는다. 어쩌면 40 중반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 돌아보는 인생에는 참으로 부질있는 일들보다 부질없는 일들의 자리가 더 많은 듯 하다.

그런 일종의 회한과 반성 같은 것들로부터 나름 인생의 교훈이라고 습득한 것일까? 자연스레 어느덧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40 중반에도 아직도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열정의 기력이 쇠하지 않은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중학생인 딸에게는 모든 삶의 요소들이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으로 가는 것과 잘 정렬이 되어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것들은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잔소리 꾼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는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에 사활을 걸려고 하는 부하 직원들의 부질없음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게 된다. 나는 이제 깨달았다는 교만함일테다. 주위 사람들 속의 삶에서 발견하는 그 부질없음들을...

소설 속 고마코의 부질없는 일들에 대해 헛수고라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시마무라의 생각에 동화되면서도, 책임을 져야할 처자식을 버려두고 고마코를 만나러 온천장 마을로 매년 발걸음을 하는 부질없는 시마무라도 판단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고마코에게 차마 헛수고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시마무라를 보면서 일종의 공감을 느끼게 되어 그냥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냥 그렇게 있는 설국의 눈과 은하수와 아름다운 산들처럼, 우리의 부질없는 일들도 그렇게 있을 수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 부질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외딴 산골의 한낱 게이샤인 고마코가 그리고 요코가 시마무라에게 남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도 모두 그 부질없는 것들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렇게 좀더 넓은 마음으로 내 인생의 부질없던 일들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으로 내 주변 사람들의 부질없음을 품어주면 그들의 아름다움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

한편이 서정시와 같은 이 소설은 일상들의 면면을 그려낸 영화와 같은 소설 천변풍경과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이 없다.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리는 온천장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와 동네 처녀 유코, 그녀들을 찾는 시마무라가 그냥 등장한다. 시마무라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그곳의 자연과 고마코, 유코의 아름다움들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와 유코의 헛수고들과 어울려 그려지고 느껴진다. 게이샤에게는 필요 없는 고마코의 문학에 대한 동경과 글쓰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유코의 헌신, 가정이 있는 시마무라의 그녀들에 대한 감정, 그 모두가 헛수고일 것이다. 그 헛수고들이 그곳의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냥 담담히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냥 존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생의 중요한 본업과 관련이 없는 그 부질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는 넓은 아량을 소설의 말미에 독자에게 선사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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